"부동산 문제? 해법은 언제나 우리 발 아래!"

입력
2020.09.07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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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슨 개프니(Mason Gaffney,

메이슨 개프니는 빈부 차와 만성 실업, 부동산 거품-붕괴의 악순환 등 자본주의의 고질 대부분이 부동산 불로소득을 방치하거나 조장한 결과이며, 급진적인 부동산 세제 개혁을 골자로 한 조세정책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해법이라고 주장한 '조지스트' 경제학자다. 그는 평생 주류 학계의 아웃사이더였지만, 희망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바록 그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했던 낙관주의자였다. masongaffney.org

메이슨 개프니는 빈부 차와 만성 실업, 부동산 거품-붕괴의 악순환 등 자본주의의 고질 대부분이 부동산 불로소득을 방치하거나 조장한 결과이며, 급진적인 부동산 세제 개혁을 골자로 한 조세정책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해법이라고 주장한 '조지스트' 경제학자다. 그는 평생 주류 학계의 아웃사이더였지만, 희망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바록 그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찾고자 했던 낙관주의자였다. masongaffney.org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세계경제가 사색이 돼 있던 2008년, 일부 언론과 학계가 분주히 찾아다닌 학자가 한 명 있었다. 대표적인 '조지스트(Georgist)' 거시 경제학자 메이슨 개프니(Mason Gaffney)였다. 개프니는 부동산 거품- 붕괴(Boom & Burst)'의 주기적 악순환을 끊임없이 경고하며, 부동산 불로소득을 겨냥한 급진적 세제 개혁만이 투기수요를 잡고 빈부차와 만성 실업 등 자본주의의 고질적 문제를 푸는 해법이라고 주장해온 이였다. 그는 학계와 언론이 월가의 모럴 해저드와 금융감독 당국의 무능, 소비자들의 무모한 투기 심리를 질타하느라 뒤늦게 핏대를 세우던 그 와중에도, 사태의 본질은 '노동으로 버는 돈보다 부동산으로 더 잘 벌고 세금도 덜 내는 현실'에 있다고, "해답은 언제나 우리 발 밑(부동산)에 있(었)다"고 단언했다.

1929년 대공황 이래의 긴 케인즈 시대와 70, 80년대 이후 통화-신자유주의 시대를 외롭게 버티며 고전경제학의 가치와 '토지(부동산)'의 중요성을 줄기차게 환기했던 '아웃사이더' 메이슨 개프니가 7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96세.

생산성이 늘수록 우리는 왜 더 가난해지는가

'조지스트'란 고전경제학의 토지 이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의 이론에 탯줄을 댄 학자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칼 마르크스와 동시대인인 조지는 경제 정의의 지향에서 마르크스와 동조했지만, 노동(노동-자본의 대립)과 계급투쟁을 사상의 중심에 두었던 마르크스와 달리 토지(부동산)와 세금을 통한 불로소득(rent) 환수가 경제 정의의 핵심이라 여겼다. 조지는 자본주의의 문제가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임금노동 '생산양식'의 한계가 아니라 불로소득-세금 '정책'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원론은 생산(물)의 3요소를 토지(지대), 노동(임금), 자본(이자)으로 규정한다. 거기서 '생산(물)= 지대+ 임금+ 이자'라는 등식이 나온다. 하지만 생산(예컨대 매출)이 아무리 늘어도 지대(예컨대 임대료)가 더 늘어나면 임금과 이자는 더디게 늘거나 오히려 감소한다. 헨리 조지는 1879년의 명저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에서 "물질적 성장으로 총생산물이 증가해도 지대(지가)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는 사실"을 논증했고, 그 결과 진보가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가속화해 상대적-절대적 빈곤과 빈부 격차를 심화하고, 투기까지 가세해 부동산 거품- 붕괴의 악순환을 낳는다고 밝혔다. 그는 임금에 부과하는 근로소득세 등 모든 세금을 없애더라도, 부동산 불로소득만은 철저히 세금으로 환수해 공동체를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이른바 '토지가치세제(Land Value Taxation, 지대세 또는 단일세)'이고, 그 철학이 '토지 공개념'이다.

고전경제학의 토지이론을 완성한 19세기 경제학자 헨리 조지. 그는 1879년 저서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부동산)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토지단일세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부동산과 경제 정의의 이론적-정책적 뼈대로, 개프니 등 일단의 '조지스트' 경제학자들에 의해 확장돼 왔다. 위키피디아

고전경제학의 토지이론을 완성한 19세기 경제학자 헨리 조지. 그는 1879년 저서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부동산)의 특수성을 분석하고, 토지단일세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부동산과 경제 정의의 이론적-정책적 뼈대로, 개프니 등 일단의 '조지스트' 경제학자들에 의해 확장돼 왔다. 위키피디아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은 공산주의와 차별화한 19세기, 20세기 초 진보운동의 바이블로 꼽히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실제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었다고 한다. 1910년 윈스턴 처칠도 "토지 독점은 가장 끔찍하고 영속적인 독점이며, 모든 독점의 뿌리와 같은 독점"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벨 에포크'의 종말과 함께, 경제(학)의 판도도 뒤집어놓았다. 국가 단위의 경제 재건과 이념적 민족적 대립-대결의 광풍 속에 경제 정의의 지향도 함께 희생됐다.

조지스트 경제학의 핵심은 토지의 특수성에 있다. 토지는 공기나 햇빛처럼 무상의 자연자원이므로(첫째), 원칙적으로 개인이 사유화할 수 없고(둘째), 공급이 늘어나지 않는 제로섬 자원이며(셋째), 마모되거나 줄어들지 않는 영속성 자원이고(넷째), 위치에 따라 가치가 좌우되는 부동의 자원(다섯째)이라는 사실. 따라서 부동산은 최상의 가치 저장-증식 수단이어서 투기에 취약하고 독점의 해악 역시 다른 자원과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하다는 판단.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 등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원칙적으로 공유했던 저 문제의식은 러시아혁명과 1차대전, 1929년 대공황을 거치며 급격히 희석됐다. '공생 공평'의 가치보다 경쟁- 승리가 당장 중요했다. 한편에서는 공산주의의 '토지 국유화' 노선에 접붙여 조지스트 경제학을 '반 자본주의적'이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악마화 했고, 다른 한편에선 '공황의 구원자' 케인즈 경제학이 급부상했다. 케인지언은 불황과 실업이 유효수요(구매력)의 부족 탓이므로 정부가 대규모 재정 지출을 통해 시장에 돈을 풀어야 한다(재정주의)고 주장했고, 영미 세계는 그 깃발 아래 결집했다. 그 결과가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즉 돈을 풀어도 물가만 오를 뿐 경기는 나아지지 않는 '유동성 함정'이었다. 70년대 이후 '신고전학파'가 헤게모니를 계승했다.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로 대표되는 신고전학파는 고전학파의 '보이지 않는 손(인간의 합리성)'과 시장 자율성에다 '작은 정부론'을 포갰다. 정부는 적극적 재정정책을 포기하고, 단기적 통화량 조절(통화주의) 이외 원칙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는 거였다. 통화-시장주의는 80년대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의 뼈대를 이루며 오늘의 세계를 이끌었다. 그 결과가 2008년 사태와 극단적인 빈부 격차라는 게 조지스트 진영의 주장이다.

주류 경제학이 수요- 공급, 화폐- 금융에 몰두하면서 고전학파가 중시했던 토지(지대)의 특수지위는 지워졌다. 아니 자본의 한 형태로, 자본에 흡수됐다. 지가(지대)는 급등했지만 부동산 세금은 발이 묶였고, 거꾸로 소득세와 소비세는 꾸준히 상승했다.

"20세기 경제학의 타락, 또는 부패"

197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재산세 수정법률(proposition 13)', 즉 카운티와 시 등이 자율적으로 부과하던 재산세율을 연 2% 이내로 동결한 법률이 단적인 예였다. 당시 부동산 가격은 연 10% 이상 치솟았고, 최대 수혜자는 부자와 스탠더드 오일 등 소수의 기업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민인 개프니는 "내 집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최고가 기준 부동산 보유세는 인상분의 0.2%에도 못 미쳤다"며 "그런 조세정책이 결국 오늘의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주요 지역의 부동산 거품과 투기 심리를 창조했다"고 말했다. 그걸 뒷받침한 게 대규모 정부 지출(재정 적자)을 통한 유동성 확대였고, 초저금리였고, 금융권의 무분별한 담보 대출과 월가의 부동산금융 상품들이었다. 부시 부자 집권기 미국 및 세계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밀턴 프리드먼은 국가 부채 자체가 국가 신용과 시장경제의 건전성에 대한 신뢰를 반영한 것이라며 월스트리트저널에 '쌍둥이 적자(재정-무역적자)는 왜 축복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개프니는 토지(부동산)의 특수성에 눈감아버린 저 일련의 경제학적 전개를 '경제학의 타락, 혹은 부패(Corruption of Economics)'라 단언했다.

메릴 메이슨 개프니(Merrill Mason Gaffney)는 1923년 10월 18일 뉴욕 주 화이트플레인스의 한 진보적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버드대 강의 교수였고, 어머니는 워싱턴D.C 아동복지국 공무원이자 여성유권자연맹(LWV) 활동가였다. 개프니의 유년기는 평탄했지만 30년대 뉴욕은 대공황으로 참담했다. 소년 개프니는 봉사활동에 열성적인 '이글 스카웃'이었다.

그가 1940년 어느 날 자전거 교통사고를 당해 병상에서 읽은 책이 '진보와 빈곤'이었고, 그 한 권의 책이 그의 삶의 분수령이 됐다. 그는 41년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당시 교수진은 이미 헨리 조지에게서 등을 돌린 뒤였다. 대학 후원자들에게 조지스트 프레임은 결코 매력적일 수 없었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44년 공군 통신장교로 입대해 뉴기니와 필리핀에서 46년까지 복무했다. 2018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군 시절 현지의 토지 불균등 분배와 거기서 비롯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지켜보며 헨리 조지의 문제의식을 새삼 환기했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의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전역 후 조지스트 경제학자인 아서 리(Arthur Leigh)가 교수로 있던 오리건 주 리드칼리지(Reed College)에 편입, 부동산 담보대출이 실업과 부의 양극화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박사급' 논문으로 학사 학위를 땄고, 56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부동산 투기 및 자유시장경제체제 하의 토지 가치 사회화를 다뤘다. 연방 관개조사국 통계요원으로 취업해 산림 목재 산업과 수자원 등 법과 '실물'을 익힌 그는 스스로 표현한 바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서 꽤 심각한 연구자"로 변신했다. 그는 약 20년간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을 전전한 뒤 76년에야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에 자리를 얻었고, 2015년 은퇴할 때까지 만 39년 재직하며 미국의 가장 전투적인 조지스트이자 주간지 '타임' 등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다.

'99%의 가난'을 비롯한 경제적 불의 및 부조리에 분노한 미국 시민들이 시작한 2011년 9월 뉴욕 월가 시위. 저 사태와 해법의 최전선에 평생 섰던 개프니는 80년대부터 대학서 은퇴 압력을 받았고, 저 무렵엔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경제학 개론'을 강의해야 했다. AP 연합뉴스

'99%의 가난'을 비롯한 경제적 불의 및 부조리에 분노한 미국 시민들이 시작한 2011년 9월 뉴욕 월가 시위. 저 사태와 해법의 최전선에 평생 섰던 개프니는 80년대부터 대학서 은퇴 압력을 받았고, 저 무렵엔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경제학 개론'을 강의해야 했다. AP 연합뉴스


그 사이 그는 워싱턴D.C의 비영리 환경자원연구소 '미래를 위한 자원(Resources for the Future)' 연구원(69~73)으로 일했고,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에서 '경제정책분석위원회'를 설립해 운영(73~76)하기도 했다. 그가 한 경제학회에서 '군비 지출의 이득(The Benefits of Military Spending)'이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건 베트남전쟁 막바지인 1972년이었다. 막대한 군비 지출이 미국과 유럽, 일본 대기업과 '정치적으로 미심쩍은' 제3세계 국가권력을 돕는 반면, 부담은 전적으로 미국 납세자와 군인들이 떠안고 있으며 "그 결과 미 제국은 붕괴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게 논문 요지였다. 그의 논문은 어느 학회지에도 실리지 못한 채 잊혔다가 2018년 3월에야 '미국 경제 사회학 저널'에 게재됐다.

그는 종신직 교수였지만 대학 당국은 80년대 말부터 은퇴를 종용했고, 급기야 신입생 대상 경제학 개론(Econ-101) 강의만 허락했다. 개프니는 "신고전학파 텍스트에 세뇌되지 않은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 오히려 기뻤다"고 말했다.

"내 조언은 단 하나, 개프니를 읽어라"

물론 그가 늘 푸대접만 받은 건 아니어서, 노벨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1943~)와 '불평등 이론의 대가' 제임스 갤브레이스(1952~) 등이 헨리 조지의 토지이론과 개프니가 심화한 조지스트 이론을 수시로 역성 들곤 했다. '우리의 당연한 권리, 시민 배당'의 작가 겸 기업인 피터 반스(Peter Barnes)는 "지대 독점이 경제뿐 아니라 민주주의마저 위협하고 있는 지금, 그 해법을 찾고자 하는 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단 하나다. 개프니를 읽어라"고도 말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개프니의 책은 없다.

드물게 몇 나라와 미국 일부 주가 조지스트 정책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 노무현 정부의 '토지공개념' 정책, 현 정부가 추진 중인 부동산보유세 인상을 골자로 한 '7.10 주택시장 안정 보완 대책' 등이 그 예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론과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껍데기만 남게 됐는지 알고 싶다면, 한국의 드문 조지스트 경제학자 김윤상의 '지공주의'(경북대출판부)나 그가 대중을 위해 곡진한 어조로 풀어 쓴 '토지공개념, 행복한 세상의 기초',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의 '토지의 경제학'을 참고할 만하다.(이 기사도 많은 부분 저 책들을 참조하고 인용했다.)

개프니는 두 번 결혼하고 3녀 3남을 두었다. 샌프란시스코대 예방의학자이면서 게이 인권운동가로도 활동해온 차남 스튜어트(Stuart) 개프니는 "별세하기 몇 주 전까지 아버지가 즐겨 부른 마지막 노래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Man of La Mancha)'의 'The Impossible Dream'이었다"고 소개했다. 늙은 돈 키호테가 부르는 그 노래의 가사는 "기사의 의무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라오"로 시작해서 "별을 좇는, 나의 추구(원정)/ 가망 없고, 아득히 멀어도/ 한점 의혹도, 주저도 없는/ 올바름을 향한 분투"로 이어진다. 그는 세상을 낙관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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