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마음이 세상을 지탱한다

입력
2020.09.03 19:28
수정
2020.09.04 12:47
25면

편집자주

그 어느 때보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힐링이 중요해진 지금, 모두가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한, 넓은 의미의 치유를 도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자연과 과학, 기술 안에서 찾고자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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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일부지만, 세상과 나 사이에는 최소한의 경계가 존재한다. 내가 온전히 나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경계가 꼭 필요하다.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나는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경계가 크고 단단할수록 그 무너짐으로 입는 상처는 깊어지고, 그 무너짐의 흔적은 지울 수 없는 흉이 된다.

살아 있고, 계속해서 살아가고자 증식하는 모든 존재는 외부 세상과 분리되는 생물학적 경계가 있다. 바이러스의 경우는 생물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한 존재이나, 증식하기 위한 유전물질(DNA, RNA)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capsid),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 생물마다 생물학적 경계의 구성 요소는 다르다. 나무의 껍질이 다르고, 곤충이나 가재, 새우의 갑각이 다르고, 뱀의 비늘이, 새의 깃털이 다르다. 인간이나 포유류의 경우는 외곽을 비교적 부드러운 상피조직이 덮고 있고, 이를 피부라고 부른다.

피부는 무엇보다 두 가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외부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고, 내부의 기능을 충실히 유지해야 한다. 즉, 세균과 같은 외부 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하고, 어딘가 부딪혔을 때 피가 흐르거나 조직이 망가지지 않게 충격을 흡수하고, 침, 땀 등의 분비를 통해 체온 조절 등을 해야 한다.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다.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내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인간의 피부는 신체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기관이다. 일반적인 성인을 기준으로 뇌의 무게가 약 1.5㎏, 간의 무게가 약 1.5~2㎏인 반면, 피부의 무게는 거의 5㎏에 달한다. 기능을 충실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구성 요소가 필요하다. 우리 몸은 매분마다 수만 개의 피부세포를 갈아치운다. 너무 보호를 잘해도 문제가 생긴다. 성장이 어렵다. 갑각류의 딱딱한 껍질이 그 예다. 그래서 갑각류는 성장을 위해 껍질을 벗고 나오는 탈피를 반복한다. 껍질 안에 있을 때는 잘 보호되지만, 탈피했을 때는 더없이 연약하다. 가장 연약한 순간에만 성장이 가능하다.

서로가 서로를 촘촘하게 꼭 잡고 의지하고 있는 세포들이 외부의 힘과 작용에 의해 그 연속성을 상실하게 될 때 의학적인 정의의 상처가 생긴다. 상처는 의학용어로 트라우마(trauma)라고 하는데, 몸과 마음의 상처 두 가지 모두에 공통적으로 쓰인다. 언뜻 의아할 수 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의 의지와는 별개로 외부에서 가해진 자극이 힘들게 쌓아 올린 나의 보호막을 무너뜨리는 것이 공통적인 상처의 정의다. 이때 아픔을 느끼는 뇌의 부위도 거의 똑같다. 누군가 칼로 찔러서 아플 때와 누군가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 배신해서 아플 때 뇌의 고통과 관련된 부위(pain matrix)는 공통적으로 활성화된다. 나라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이 찢어지거나 뜯겨져 나갈 때 우리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나라는 세상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상처 이후에는 치유가 필요하다. 피부에서 치유의 과정은 염증기, 증식기, 흉터생성기의 3단계로 나뉜다. 상처가 아문 뒤에 남는 자국이 흉이다. 치유는 결국 흉이 생기기 위한 과정이다. 피부나 마음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나의 '흉'을 본다면, 그건 '상처가 아문 자국'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흉을 가졌다는 것은 나와 세상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재건되는 치유의 역사를 증명한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다. 상처와 흉의 반복이 바로 나라는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다.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도 “마음은 상처받음으로써 살아간다(Hearts Live By Being Wounded)”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장동선 뇌과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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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선뇌과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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