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보내며

입력
2020.09.02 04:30
수정
2020.09.02 15:49
25면


여름은 열매를 키운다. 동요처럼 쨍쨍한 햇빛을 먹으며 주렁주렁 열리는 열매는 여름이라는 말과 서로 닮았다. 옛말 ‘녀름짓다’는 농사를 짓는다는 뜻이다. ‘여름에 하루 놀면 겨울에 열흘 굶는다’는 속담처럼, 여름은 한시도 허투루 쓰지 않는 부지런한 계절이었다. 어디 햇빛뿐이랴. ‘단비’와 ‘꿀비’도 열매를 키웠다. 여름비는 열매에 ‘약비’, ‘복비’이고, 사람에게는 ‘잠비’라고도 불렸다.

8월 무더위에도 고마운 ‘실바람’이 있었다. 실바람이라 하면 실 같이 가느다란 바람 같은데, 더위에도 서늘한 ‘실바람’이 그렇게 약골일 리가 없다. 실이란 계곡, 골짜기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지금도 밤이 많이 나는 곳은 고유 지명으로 밤실로 불리고, 행정 지명으로는 율곡(栗谷)으로 적힌다. 여름에 나무꾼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 준다는 실바람은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여름은 쉽게 꺾이지 않겠지만 여름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가을이 온다. 낮에는 여전히 여름을 붙잡는 매미소리가 우렁차지만 밤에는 가을을 부르는 풀벌레 소리가 밀려든다. 하루에 두 계절이 존재하듯, 벌써 밤이면 바람의 기운이 다르다. 이른 가을에 부는 선선한 ‘색바람’, 선들선들 시원하게 부는 ‘건들바람’이 저만치 와 있다. ‘건들팔월’이라는 말이 있다. 건들바람처럼 덧없이 지나간다는 뜻인데, 온 세상을 지배할 듯 위력을 떨치던 8월도 그렇게 지나가고야 만다. 이제는 가을이다. 가을은 계절 이름일 뿐만 아니라 농작물을 거두어들인다는 뜻이다. 여름의 열매를 거두는 ‘가을걷이’ 때가 되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며 가을을 맞는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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