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업체의 대국민 사기극이 부른 할랄 의무화

입력
2020.09.03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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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할랄 인증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 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제빵업체 뚜레쥬르가 올해 1월 인도네시아 울라마협의회(MUI)로부터 받은 할랄 인증 표시를 매장에 걸고 있다. 뚜레쥬르 제공

제빵업체 뚜레쥬르가 올해 1월 인도네시아 울라마협의회(MUI)로부터 받은 할랄 인증 표시를 매장에 걸고 있다. 뚜레쥬르 제공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이 상점에서 수입 식품을 고를 때 유통기한과 더불어 꼭 확인하는 게 있다. 녹색 바탕의 할랄 인증 표시다. 교직원 에비아나(54)씨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위생적이고 좋은 품질,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먹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독실하지 않은 무슬림도 할랄 인증 제품에 자연스레 손이 간다. "비록 신앙은 무뎌졌지만 어릴 때부터 먹어왔던 식습관 때문"이다. 잘 팔린다는 소문이 난 수입품 정보를 공유할 때도 반드시 묻는다. "할랄 받았어?"

할랄은 '허용' '합법'을 뜻하는 아랍어다. 행동, 장소에도 적용되지만 식품으로만 좁히면 이슬람율법(샤리아)에 따라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도축ㆍ처리ㆍ가공된 모든 식품을 뜻한다. 할랄이 아닌 식품을 가리키는 하람(금지ㆍ불법) 식품은 돼지고기와 그 부산물, 술 등 알코올, 피와 그 부산물, 파충류와 곤충류 등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할랄 식품은 돼지고기나 알코올 성분이 전혀 없어야 한다.

인도네시아 할랄은 몇 가지 사건을 통해 현재의 꼴을 갖췄다. 1988년 현지 식음료 34종에 돼지기름 등이 함유돼 있다는 한 대학 교수의 폭로가 무슬림 소비자를 분노케 했다. 대규모 불매운동과 시위 끝에 이듬해 민간 이슬람단체인 울라마협의회(MUI)가 할랄 인증을 시작했다. 이후 MUI는 할랄 인증의 독점 권한을 가진 비(非)정부기관으로 성장한다.

인도네시아 이슬람단체 울라마협의회(MUI)가 발급한 할랄 인증 표시(왼쪽 사진)와 새롭게 정부기관 할랄인증청(BPJPH)이 발급하는 할랄 인증 표시. BPJPH 제공

인도네시아 이슬람단체 울라마협의회(MUI)가 발급한 할랄 인증 표시(왼쪽 사진)와 새롭게 정부기관 할랄인증청(BPJPH)이 발급하는 할랄 인증 표시. BPJPH 제공

2001년 '아지노모토 스캔들'은 수입 제품의 할랄 인증 필요성을 상기시켰다. 일본의 대표 종합식품업체 아지노모토가 조미료의 할랄 인증을 받은 후 원료를 바꾼 게 화근이었다. 공장 검사에서 돼지 췌장 성분이 발견되자 할랄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소비자들은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분노했다. 공장 가동은 중지됐고 관련자들은 구속됐다. 50%를 넘던 시장점유율은 5%대로 급락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4년 8월 '인도네시아에 들어와 유통되고 거래되는 제품은 반드시 할랄 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할랄제품보장법(33호 법률)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0월 17일 인도네시아는 모든 수입 식음료에 할랄 인증을 의무화했다. 2017년 공식 출범한 종교부 산하 할랄인증청(또는 할랄보장청ㆍBPJPH)이 이날부터 인증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다만 적용은 5년 뒤(2024년 10월 17일)로 미뤘다. 자율 선택에서 예외 없는 의무로, 민간 인증에서 정부 인증으로 크게 바뀌지만 시행 세칙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유예기간은 다행스럽고, 구체적인 지침 미비는 혼란스럽다.

기관 간 알력 다툼도 불거지고 있다. 엄청난 이권 사업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MUI가 정부를 상대로 세 차례 소송까지 걸었다. BPJPH가 모두 승소했으나 표면적으로 인증 업무를 중단한 MUI가 산하기관과 대행업체를 통해 여전히 인증서를 발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제빵업체 뚜레쥬르도 올 1월 MUI로부터 할랄 인증을 받았다. 이슬람단체의 힘이 세고 마룹 아민 부통령이 MUI 의장 출신이라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한태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자카르타지사 차장은 "현지 상황에 맞춰 대응할 수밖에 없는 과도기"라고 설명했다.

'한국 라면 파동' 이후 울라마협의회(MUI) 할랄 인증을 받은 삼양식품 라면. 삼양식품 제공

'한국 라면 파동' 이후 울라마협의회(MUI) 할랄 인증을 받은 삼양식품 라면. 삼양식품 제공

할랄 인증이 선택이던 시절에도 우리 기업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7년 6월 '할랄이 아니다'는 표시가 없는데도 돼지 성분이 발견돼 수입 허가가 취소된 '한국 라면 파동'이 대표적이다. 이후 할랄이 아님을 표시하는 관련 조항까지 생겼다. 당시 위기를 기회로 삼은 기업도 있다.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은 같은 해 9월 한국 라면 최초로 MUI 할랄 인증을 받았고, 이듬해 매출이 전년 대비 42% 급증했다. 현지 대표 편의점 인도마렛 집계 결과, 지난해 불닭볶음면의 점유율은 10.3%로 현지 라면 인도미 등에 이어 전체 3위다. 4위 업체 점유율이 3.8%인 걸 감안하면 한국 라면이 당당히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기업에게 인도네시아의 할랄 의무화는 무역장벽이자 기회다. 2억7,000만 인구의 87%가 무슬림인 현지 시장에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선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다. BPJPH는 할랄 인증을 받은 업체들의 매출이 인증 전보다 평균 10~12%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이슬람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2018년 기준 할랄 식품 소비국 1위(1,730억달러)다. 전 세계 할랄 식품 소비(1조3,700억달러)의 약 13%에 해당한다. 20억 무슬림의 기호를 사로잡기 위한 핵심 지역이 인도네시아인 셈이다.

전 세계 할랄 식품 소비 순위

전 세계 할랄 식품 소비 순위

할랄을 종교 관점에서 바라보며 편견이나 거부감을 가져야 하는지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은 "인도네시아의 할랄을 그들의 문화, 생활방식, 소비습관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쌍방향 문화 교류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다른 문화인 한류를 사랑하는 현지인들 생각도 비슷하다. '안전하고 믿을만한 좋은 품질의 제품', 누구나 바라고 추구하는 소비를 그들은 '할랄'이라고 부른다.

인도네시아 현지 업체가 할랄 인증을 받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마케팅닷코닷아이디 캡처

인도네시아 현지 업체가 할랄 인증을 받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마케팅닷코닷아이디 캡처


자카르타=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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