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합의' , 그 추한 핑계

입력
2020.09.0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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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패트리샤 블라록의 조용한 혁명(9.7)

1963년 셀마공공도서관 관장 패트리샤 스위프트 블라록. 그는 셀마-몽고메리 행진 2년 전 '차별없는 세상'을 먼저 열었다. 위키피디아.

1963년 셀마공공도서관 관장 패트리샤 스위프트 블라록. 그는 셀마-몽고메리 행진 2년 전 '차별없는 세상'을 먼저 열었다. 위키피디아.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분수령인 1965년 3월 앨라배마 주 '셀마-몽고메리 행진'은 모두 세 차례 감행됐다. 유혈사태로 중단된 7일 행진 참가자는 500여 명이었고, 이틀 뒤 2차 행진에는 약 2,500여 명이 모였다. 3월 21일 3차 행진때는 약 8,000명이 셀마 시를 출발했고, 80번 고속도로를 따라 닷새간 85km를 걸어 몽고메리의 주의사당 앞에 모인 시위대는 무려 2만 5,000명이었다. 셀마 시 전체 인구(당시 약 2만 8,000명)에 육박하는 군중 앞에서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선언했다. "(차별 없는 세상은) 언제쯤 열릴까요? 단언컨대 아직 절망적이어도, 아무리 힘겨워도, 그날은 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차별 없는 세상'은 이미 2년 전 셀마 공공도서관에 열려 있었고, 소위 '국민적 합의'에 반하는 그 위험한 일을 주도한 건 당시 만 50세 여성 패트리샤 블라록(Patricia Swift Blalock, 1914.5.9~ 2011.9.7)이었다. 그는 분리차별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으며 책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야 한다고, 백인 시장과 시의회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마침 당시 시장은 투자에 열을 올리던 실용 온건파였다. 시 당국과 의회는 최대한 잡음없이 진행하라는 단서를 달아 그 요구를 수용했다.

블라록은 5월 13~19일 도서관을 휴관했다. 그 일주일 동안 열람실 흑백 분리 시설과 명패를 모두 없앴고, 아예 의자를 지하 창고로 치웠다. 월요일인 20일, 아무런 공고도 안내도 없이 도서관 문이 다시 열렸다. 흑인 전용 출입구였던 뒷문을 잠궈 모두 정문으로만 입장하게 했다. 그렇게 흑백의 이용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며 차별 없는 도서관 시대를 맞이했다. 출입증을 찢으며 항의하는 백인이 있었지만 큰 충돌은 없었다.

블라록은 시카고대에서 사회사업학을 전공해 주정부에서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했고, 만 27년(63~88년) 셀마 도서관장을 지냈고, 사후 여러 인권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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