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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집주인 동의 필요 없다며? 정부-은행 핑퐁 탓 전세대출 연체될 판

입력
2020.08.26 04:3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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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서울 시내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모습. 연합뉴스,

23일 서울 시내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모습. 연합뉴스,

정부가 새 주택임대차보호법 시행 이후, 세입자가 전세자금대출을 연장할 때 '집주인 동의를 받지 말라'는 지침을 시중은행에 전달했음에도 여전히 일선 현장에선 예전 관행에 막힌 세입자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은행은 여전히 "명확한 지침을 전달받지 못했다"며 대출 연장을 거부하고 있는데, 정부는 "분명히 지침을 전달했으며, 다시 한번 강하게 전달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정부와 은행의 '고래등 싸움'에 세입자의 '새우등'만 터지는 형국이라는 비판이 높다.

정부-은행 ‘핑퐁’에 세입자 피해 여전

25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앞서 금융위원회 등 정부 부처들은 보증기관을 통해 시중은행에게 "전세대출 연장과 관련해 집주인 동의를 받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하지만 시중은행들은 "아직 지침을 받지 못했다"며 집주인 동의 후에 대출을 실행하는 기존 관행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지침 전달의 통로 역할을 하는 보증기관은 “업무 과정에서 은행들에게 동의 절차를 밟지 말라고 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은행들은 '더 명확한 지침'을 요구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보증기관을 통해서 정부가 의사를 전달한다는 건, 대출 과정에 은행이 보증기관과 협의해 해결하라는 의미로 보인다”며 “이 정도 지침만으로는 수많은 은행 지점에서 일괄적으로 기존 관행을 수정하기엔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런 정부와 은행의 '핑퐁' 와중에 실제 세입자의 피해 사례도 확인되고 있다.

경기 용인시 아파트에 전세를 사는 A씨는 은행의 전세대출 연장 거부로 조만간 연체 위기에 몰려 있다. 2018년 8월, 전세기간 2년 보증금 2억원에 이 아파트 전세계약을 맺은 A씨는 2억원 중 1억6,000만원을 시중은행 전세대출로 마련했다.

최근 전세계약 만기를 맞아 A씨는 지난 7월말 집주인과 계약연장을 의논했다. 이 아파트는 부부 공동소유(각 지분 50%)였는데, A씨는 집주인 B씨(부인)와 “보증금 인상 없이 전세계약을 연장하자”고 구두 합의했다. 이럴 경우 법상 새 계약서를 쓸 필요 없이 계약은 자동 연장된다.

하지만 8월 들어 집주인 C씨(남편)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B씨와 달리 "보증금을 올려야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C씨는 보증금을 1억원 올려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미 A씨와 B씨가 구두로 계약연장에 합의한데다, 새 임대차법 시행으로 보증금도 ‘최대 1,000만원(2억원의 5%)’까지만 올릴 수 있어 C씨의 요구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

전세입자 A씨 피해 사례. 송정근 기자

전세입자 A씨 피해 사례. 송정근 기자


'전세대출 연장 동의' 무기 삼는 집주인

그러자 C씨는 A씨의 ‘전세대출 연장’을 걸고 넘어졌다. 전세계약이 연장되면 전세대출도 사실상 자동 연장되지만, A씨가 거래하는 은행에선 여전히 전세계약을 연장한 게 맞는지 집주인에게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고 있다.

C씨는 최근 일부러 은행의 연락을 피하고 있는데, 은행은 B씨가 전세계약 연장에 동의하더라도 또 다른 집주인인 C씨에게 이를 확인하지 않으면 대출을 실행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A씨는 "C씨가 전세보증금을 다른 부동산에 투자 중이어서 당장 돌려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이대로 이달 말일 전세대출 만기일이 지나면 꼼짝 없이 연체자가 될 처지"라고 호소했다. A씨가 전세대출을 연체하게 되면 즉시 ‘연체이자’를 내야 하고, 기간이 길어지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될 수도 있다. 현재 A씨는 다른 대출을 일으켜서라도 전세대출을 갚을지 고민 중이다.

“정부와 은행, 명확한 실무 조율 절실”

A씨 외에도 최근 "집주인이 연락을 피해 전세대출 연장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세입자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서울 송파구 아파트에 전세를 사는 한 회사원은 "보증금을 5% 이상 올리고 이면 계약서를 쓰자는 집주인 제안을 거절했다가 전세대출 연장 동의를 못받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당국은 은행들에게 재차 지침을 전달하겠다는 방침이다. 당국 고위 관계자는 “앞서 보증기관을 통해 지침을 전달했지만 일선 은행에서 여전히 변화가 없다면 정부의 개선 의지를 더 강력하게 담아 지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입자들은 번드레한 말 잔치 속에 당국의 지침조차 통하지 않는 현실을 조속히 개선해 줄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A씨는 “정부와 은행 사이에 정확한 의견 교환과 실무 절차 조율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이상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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