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더 큰 '남의 떡'

입력
2020.08.18 13:37
수정
2020.08.18 17:37
25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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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이 부러울 때 내 것은 안 보인다. 동화에서 치루치루가 파랑새를 찾아 멀리 떠난 것과 같이 잠시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한국어의 ‘남의 떡이 크다’나, 일본어의 ‘옆집의 잔디가 더 푸르다’는 내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는 일침이다. 엄마 친구의 아들이라는 ‘엄친아’는 ‘남의 떡’의 21세기 버전이다. 실력과 외모까지 다 갖춘 아들을 뜻하지만, 세상에 그런 아들이 얼마나 있을까? 남의 떡은 정체도 불명하지만 정작 먹을 수 있는 손안의 떡을 홀대하게 한다.

모어와 외국어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부모 나라 체험 캠프’로 재미동포 2세를 만나보면 제법 한국말을 잘해 보여도 실상은 유치원생 수준일 때가 많다. 어릴 때부터 한국어로 부모와 소통했으나, 높은 수준의 지적 사고는 한국어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원래 말이 성장한 이력은 나이테처럼 남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말은 사회 속에서 배우는 것이니, 한 사람의 말 수준은 경험치를 넘을 수 없는 법이다.

이주한 한국인 가정에서 한국어가 잘 전수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어려운 처지에서 고군분투한 부모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어로서 한국어를 얻는 것이 어렵고 귀하다는 것을 잘 몰랐던 아쉬움을 토로하고자 한다. 바르고 수준 높은 한국어를 얻기 위해 우리는 꽤 많은 시간을 집중적으로 썼다. 숨 쉬는 것처럼 늘 곁에 있었을 뿐, 한국어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남의 힘에 눌려 내 말을 못 쓴 그때만큼 목숨 걸고 저항하지는 못하더라도, 못 먹을 남의 떡을 바라보다가 손안의 내 떡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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