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오래된 와인 좋아하는 이유 ... 일제 때 아카다마 포트와인

입력
2020.08.15 04:30
17면

포도와 브랜디의 만남, 포트와인

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동아일보 1929년 8월 8일자에 실린 아카다마 포트와인(赤玉 ポ?トワイン) 광고. 아카다마 포트와인은 일본 산토리에서 생산한 포트와인이다. 현재는 아카다마 스위트와인으로 출시된다.

동아일보 1929년 8월 8일자에 실린 아카다마 포트와인(赤玉 ポ?トワイン) 광고. 아카다마 포트와인은 일본 산토리에서 생산한 포트와인이다. 현재는 아카다마 스위트와인으로 출시된다.


얼마 전 우연히 일제강점기 때 신문에 게재된 와인 광고를 접했다. 일본 주류회사 산토리에서 생산한 아카다마(赤玉) 포트와인 광고였다(동아일보 1929년 8월 8일자).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수탈 대상이었던 식민지 조선에 와인 광고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포트와인은 포르투갈에서 생산하는 주정 강화 와인이다. 하지만 원산지보호 제도가 시행되기 전까지는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나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포트와인을 생산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포트와인을 생산한 적이 있다. 농어촌개발공사와 일본의 산토리가 합자해서 만든 ㈜한국산토리에서 ‘산리 포트와인’을 1969년에 생산했다. 얼마 안 되어 그 회사는 운영난으로 포트와인 생산을 중단함과 동시에 해태주류에 매각됐다.

1987년 수입자유화가 되기 이전까지 다른 나라의 와인은 우리나라에 자유롭게 들어오지 못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일괄 수입해 필요한 곳에 한정된 양의 와인을 공급했다. 그러다 보니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외국 와인은 밀반입되거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왔는데, 그런 와인의 상당수가 포트와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와인은 달콤하고 오래될수록 좋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맛이 달고 알코올 도수가 높아 오래 보관할 수 있던 포트와인의 기억 때문이리라.


신문에 실린 산리 포트와인 광고.

신문에 실린 산리 포트와인 광고.


산리 포트와인은 농어촌개발공사와 일본 주류회사 산토리가 합자해서 만든 ㈜한국산토리에서 1969년 생산했지만, 곧 생산이 중단되었다. 대전시공식블로그 제공

산리 포트와인은 농어촌개발공사와 일본 주류회사 산토리가 합자해서 만든 ㈜한국산토리에서 1969년 생산했지만, 곧 생산이 중단되었다. 대전시공식블로그 제공


여기서 주정 강화 와인에 관해 알아보자. ‘주정 강화’란 와인을 양조하는 과정에 주정(酒精)을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높였다는 뜻이다. 특히 포트와인은 주정 가운데 알코올 함량이 75~77%나 되는 브랜디(와인 증류주)를 첨가해 만든다. 멀쩡한 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한 데에는 역사적 까닭이 있다.

12세기 초, 보르도가 속한 프랑스 서남부 지역을 영지로 둔 한 귀족에게 엘레오노르라는 딸이 있었다. ‘중세 최고의 상속녀’라 불릴 만큼 풍요롭고 넓은 지역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지만 15년 뒤 이혼하고 만다.

엘레오노르는 두 달 뒤 11세 연하인 노르망디 공작 청년과 재혼했다. 얼마 안 있어 이 청년은 영국(당시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자 엘레오노르가 상속한 영지 역시 영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프랑스는 15세기까지 이어진 100년 전쟁을 치른 뒤에야 300여년 만에 그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기후 탓에 와인 생산이 활발하지 않았던 영국은 당시 제1의 와인 수입국이었다. 영국 입장에서는 보르도는 그야말로 최고의 와인 산지였다. 가까운 수출항인 데다가, 보르도를 영국 국왕이 다스릴 때에는 세금 특혜 덕분에 싼값에 보르도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특히 영국인들이 ‘클라레(Claret)’라 칭한, 맛도 색도 연한 보르도산 레드와인이 큰 인기였다. 오늘날의 맛도 색도 진한 보르도산 레드와인을 떠올리면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100년 전쟁 이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프랑스 국왕은 한때 영국으로의 수출을 전면 금지시키기도 했거니와, 이후 수백 년 동안 양국 간에는 불안한 외교만큼이나 불안정한 관세율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이 탓에 와인 상인들은 프랑스 와인을 대체할 안정적인 와인 공급처를 찾아 지중해ㆍ에스파냐ㆍ포르투갈로 향했다.

그러다 에스파냐왕위계승전쟁(1701~1714년)이 일어났다.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서거하게 되자, 서열에 따라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가 왕위를 계승하여 에스파냐의 펠리페 5세가 되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자신들도 에스파냐의 왕권을 이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프랑스가 에스파냐까지 흡수할지 모른다는 우려 탓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열강들이 연합하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편에 섰다. 때마침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의 윌리엄 3세는 프랑스 와인의 수입을 전면 금지시켰다. 곧 수입이 재개되었지만 높은 보복관세를 부과했다. 반면 포르투갈이 프랑스 편에 서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자, 영국은 포르투갈과 메투엔 조약(1703년)을 맺어 관세율을 프랑스의 3분의 1만 부과했다. 이때부터 와인 수입상들은 프랑스 대신 본격적으로 포르투갈로 향했다.

수입상들은 이미 1675년부터 대서양 연안에 자리 잡은 포르투 항구를 통해 포르투갈산 와인을 영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곳은 보르도 항에 비해 영국까지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항해하는 동안 와인이 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포르투와 가까운 북서부 지방의 와인은 구조감이 약한 데다가 당시엔 코르크로 밀봉한 유리병이 아니라 오크통에 담아 최소한의 산화 방지만 했으니, 항해가 길어지면 와인이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대안을 찾던 수입상들은 포르투갈 내륙에서 색이 진하고 맛이 묵직한 레드와인 산지를 발견했다. 바로 도루 강 상류에 위치한 알토 도루였다.


도루 밸리의 가파른 계단식 포도밭. 이곳에서 재배한 포도로 포트와인을 만든다. 투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 투리가 프랑카(Touriga Franca), 틴타 바호카(Tinta Barroca), 틴타 호리츠 (Tinta Roriz), 말바지아 피나(Malvasia Fina) 등 30여가지 포도 품종을 블랜딩해 만든다. 그라함 와이너리 제공

도루 밸리의 가파른 계단식 포도밭. 이곳에서 재배한 포도로 포트와인을 만든다. 투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 투리가 프랑카(Touriga Franca), 틴타 바호카(Tinta Barroca), 틴타 호리츠 (Tinta Roriz), 말바지아 피나(Malvasia Fina) 등 30여가지 포도 품종을 블랜딩해 만든다. 그라함 와이너리 제공


도루 강은 에스파냐에서 시작되어 포르투갈 내륙을 가로질러 대서양으로 흘러 나간다. 이 덕분에 수로를 이용해 배로 와인을 운반할 수 있으니 더없이 적합했다. 그곳에서 상인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1678년 도루 강 인근 ‘라메고’라는 마을의 수도원장이 만들어 영국 상인들에게 소개했던 와인, 바로 주정 강화 와인이었다.

포트와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포트와인은 주정의 양을 늘리거나 주정 첨가 시기를 조절하면서 포트와인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다.

마침내 영국으로 수출된 포트와인은 큰 인기를 끌었고 영국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와인이 되었다. 오죽하면 “포트의 어머니는 포르투갈이지만, 아버지는 영국이다”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영국인들은 자녀가 태어나면 그해 수확한 포도로 빚은 포트와인을 한 박스씩 사서 쟁여놓고 자녀의 성년식, 결혼식과 같은 중요한 이벤트에 선물했다. 이따금 영화에 등장하듯, 식사 후에 남자들이 모여 포트와인을 마시며 시가를 피우는 장면은 전통이 되었다.

포트와인이란 이름은 와인을 수출한 항구 이름 ‘포르투(Portoㆍ영어식으로는 Oporto)’에서 유래했다. 포르투가 정식 이름이지만, 영국으로 주로 수출되다 보니 영어식 이름인 ‘포트(Port)’로 알려진 것이다. 현재는 ‘Porto’로 표기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포트와인은 지역의 대표 품종인 투리가 나시오날 등 30여종의 포도를 블랜딩해 만든다. 발효가 진행되는 중간에 브랜디를 첨가하여 발효를 중지시킨다. 그러면 포도의 당이 알코올로 온전히 전환되지 않아, 달콤하면서도 알코올 도수 20도 안팎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도루 강 상류, 알토 도루에서 양조한 와인을 강을 따라 싣고 와 포르투와 접한 빌라 노바 드 가이아(Vila Nova de Gaia)에서 숙성해 완성한다.


다양한 종류의 포트와인. 왼쪽부터 화이트포트, 루비포트, 빈티지포트, 레이트 보틀드 빈티지포트, 토니포트(숙성 기간에 따라 10, 20, 30, 40년). 그라함, 테일러, 다우 와이너리 제공

다양한 종류의 포트와인. 왼쪽부터 화이트포트, 루비포트, 빈티지포트, 레이트 보틀드 빈티지포트, 토니포트(숙성 기간에 따라 10, 20, 30, 40년). 그라함, 테일러, 다우 와이너리 제공


포트와인은 종류가 복잡하고 많아, 여기서는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포트와인은 재료인 포도의 색깔에 따라 화이트포트와 레드포트(루비색, 토니색)로 나뉜다. 화이트포트는 청포도로 만든 와인으로 주로 식전주로 마신다. 이에 반해 레드포트는 적포도로 만들며, 맛이 감미로워 치즈나 견과류, 초콜릿에 곁들여 식후주로 마신다.

포트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레드포트는 종류가 많아 꽤 복잡하지만, 빈티지(생산연도)가 적혀 있는가와 그렇지 않은가로 구분하면 쉽다.

빈티지가 적힌 와인은 빈티지포트와 레이트 보틀드 빈티지포트가 있다.

빈티지포트(Vintage Port)는 포도의 작황이 좋은 해에만 생산하는데, 10년에 두세 번밖에 만들지 못한다. 그야말로 최상급 와인이다. 와인을 만든 뒤 나무통에서 2년 정도 숙성시킨다. 여과하지 않고 병입하기 때문에 와인 성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병숙성을 오래하면 할수록 풍미가 좋아진다. 마시기 전에 디켄팅을 해 찌꺼기를 거르는 게 좋다.

레이트 보틀드 빈티지포트(Late Bottled Vintage Port)는 병입을 늦게 한 와인을 말한다. 줄여서 LBV라 부르는데, 빈티지포트와는 달리 매해 만들며 통에서 4~6년 숙성한 뒤 찌꺼기를 여과해 병입한다. 오래 숙성하기도 했거니와 여과도 했기 때문에 별도로 병숙성할 필요 없이 바로 마실 수 있다. 장기간의 병숙성이 필요한 빈티지포트의 대안으로 만들어진 이 와인은 가격 역시 빈티지포트에 비해 저렴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빈티지가 적히지 않은 와인에는 와인색 그대로인 루비포트와 토니포트가 있다.

루비포트(Ruby Port)는 말 그대로 진한 붉은색 포트를 말한다. 커다란 나무통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숙성해 만든다. 포트와인 가운데 가장 신선하고 과일향 그대로의 맛을 선사한다. 맛도 가격도 접근하기 좋아, 와인 가게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 루비포트에는 ‘리저브’라 적힌 와인도 있는데 좀 더 상급이다.

토니포트(Tawny Port)는 루비포트와 달리 작은 나무통에서 오랜 시간 숙성시킨다. 숙성하는 동안 서서히 산화되면서 붉은색이 토니색(황갈색)으로 변한다. 과일 풍미는 사라지고 대신 견과류나 나무향, 토피 같은 깊고 묵직한 풍미를 띤다. 숙성 기간에 따라 10년, 20년, 30년, 40년으로 출시된다. 이 외에도 토니포트에는 비교적 짧게 숙성한 일반급 ‘토니포트’와, 빈티지가 표시되는 최상급인 ‘콜헤이타’도 있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이날을 맞아 포트와인이라니! 일제강점기의 와인 광고 하나가 이 글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오늘이 오기까지 숱한 독립투사들이 경성 거리를 뛰어다녔으리라. 경성의 어느 호텔 라운지에서 모던보이 차림을 한 그들이 비밀리에 접선했으리라. 위장을 위해 광고에 등장한 포트와인을 주문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포도아(葡萄牙ㆍ포르투갈)라는 나라에서 건너온, 박덕(博德ㆍ포트)이라는 포도주를 아시오?”

“적포도주(赤葡萄酒)에 발란덕(撥蘭德ㆍ브랜디)을 넣어 만든 포도주 아니오.”

”오늘은 불란서산 상백윤(上伯允ㆍ샴페인)과 복이탈(卜爾脫ㆍ보르도)을 시킵시다. 그리고 식후주로 박덕도 주문합시다. 아니, 감시의 눈초리가 많으니 아카다마 포트가 좋겠소.”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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