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전 한은 총재 "부동산 폭등, 이대로는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 온다"

입력
2020.08.10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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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잡지 못하면 모든 경제정책은 실패"
"보유세 올리고 공공임대주택 늘려야"
"탐욕적 자본주의 지속 불가능... 기부로 작은 실천"

지난 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한국 경제의 양상과 모교에 10억원을 기부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지난 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한국 경제의 양상과 모교에 10억원을 기부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1980년대 일본이 겪던 현상을 우리가 겪고 있습니다. 저금리로 푼 돈을 언젠가는 회수해야 할 텐데, 지금처럼 집값이 오른 상태에서 그렇게 하면 폭락이 뒤따르고 은행이 부실화하고 경기침체가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집값을 잡지 못하면 모든 경제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게 될 겁니다."

노태우 정부의 건설부 장관으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한국은행 총재로 우리나라 부동산의 양면(실물과 금리)을 모두 다뤘던 박승 전 한은 총재는 지난 7일 만나자마자 부동산 걱정부터 꺼냈다.

인터뷰를 청한 건 그의 '전재산 기부' 소식 때문이었지만 박 전 총재는 이대로 가면 한국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 빠질 수 있을뿐더러 자본주의의 미래조차 불투명하다고 격정을 토로했다.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를 맞아 펼치는 저금리와 유동성 공급 정책은 비상 대책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첫째 물가 상승이고, 둘째가 부동산 등 자산 거품이다. 당장 물가 상승 우려는 적지만 부동산 거품은 큰 문제다. 집값 폭락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올까 걱정된다."

-집값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문제는 투기 수요다. 내가 건설부 장관으로 일산ㆍ분당 등 1기 신도시를 건설할 때 주택 보급률이 56%였다. 지금은 100%가 넘는다. 다주택자의 보유 주택이 전체의 60% 이상이다. 유동성이 부동산에 몰리는 것은 보유 비용이 낮기 때문이다. 보유 비용은 곧 보유세다. 해외 선진국은 해마다 주택 가격의 1~3%를 내는데, 한국은 3분의 1 수준이다. 보유세를 올리면 충격을 받겠지만, 투기 수요는 싹 없어질 것이다. 정부가 다주택자 종합부동산세를 많이 올리고 있지만 앞으로도 거의 2배 가까이 더 올려야 한다."

-보유세를 올리면 실수요자가 피해를 본다는 반론도 있다

"대신 소득세를 감면해야 한다. 노동 소득에는 세금을 줄이고, 자산 소득은 중과하라는 것이다. 노동과세를 낮추면 소비가 늘고, 내수가 늘어나니 성장률은 높아질 것이다. 공급 정책도 펼쳐야 하지만, 도심에 공급을 늘려도 투기 대상이 되면 소용이 없다. 공공 임대주택을 대폭 늘려 청년들이 장기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기 신도시나 강남권 새 주택도 상당 부분 공공 임대주택으로 해야 한다. 노태우 정부 때 200만호를 공급했던 것처럼 정부가 강한 의지로 추진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 규제ㆍ노동개혁 병행해야

박 전 총재는 코로나19 이후 경제의 변화를 예상하며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성장정책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코로나 이후에는 △경제와 생활의 디지털화가 촉진되고 △수출이 둔화하고 △친환경 산업이 각광 받을 것이다. 우리 경제도 적응해야 한다.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는 '낙수효과' 성장 시대에 유효했다. 이제 내수 주도 성장으로 바꿔야 한다. 물론 내수로 성장하는 길은 대단히 어렵고 저성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면서 가계소득을 어떻게 늘릴 지 고민해야 한다.

앞으로의 대세인 서비스업, 4차산업, 디지털화는 생산의 탈 노동화를 부른다. 빈부 격차가 커지고 양극화가 심화할 것이다. 양극화를 조정할 ‘큰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득주도성장에 비판이 많다

“소득주도성장 자체가 아니라 실행의 문제다. 임금을 올리는 것은 맞지만 폭은 조절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제를 자영업자나 기업 사정에 맞지 않게 시행했다. 실용성이 부족했다.

규제와 노동 개혁도 부족했다. 규제는 구시대 기득권의 보호 장치다. 정부 부처와 공직자, 전문직, 주요 기업도 기득권자다.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부와 정치권은 규제를 푸는 방향을 기본으로 잡고 나아가야 한다.

노동 개혁은 진보정부에서 해야만 효과가 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노동유연성 없이는 실현하기 어렵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에게 사회 안전망을 주고, 노동계는 노동유연성을 양보하는 대타협이 있어야 한다.”

박승(오른쪽) 전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3일 모교인 전북 김제 백석초등학교에 장학기금 10억원을 기부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백석초교는 박 전 총재가 신탁 형태로 기부한 10억원에서 매 분기마다 발생하는 약 900만원의 이자액을 장학금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전북교육청 제공

박승(오른쪽) 전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3일 모교인 전북 김제 백석초등학교에 장학기금 10억원을 기부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백석초교는 박 전 총재가 신탁 형태로 기부한 10억원에서 매 분기마다 발생하는 약 900만원의 이자액을 장학금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전북교육청 제공


'공동체적 자본주의' 실천 위해 전 재산 기부

박 전 총재는 점점 심해지는 양극화에 맞서 ‘포용적 성장’과 ‘공동체적 자본주의’를 역설했다. 지난 3일 장학기금 10억원을 하나은행에 신탁해 고향인 전북 김제시 모교 백석초등학교에 기부한 건 이런 신념의 실천이기도 하다.

-재산 사회 환원을 결심한 이유는

“우리나라 자본주의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탐욕적 자본주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빈부 세습이 심해지고 계층 이동이 불가능해지면 한국 자본주의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미국의 갑부들이 사회적 경영 필요성을 선언하고, 대부분 자산 기부를 약정하는 것은 함께 잘 사는 자본주의를 만들자는 목표 때문이다. 우리 정책에 거울로 삼아야 한다.

내 평소 주장은 탐욕적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공평한 사회, 계층 이동이 가능한 사회를 이루자는 것이다. 주장도 하고, 기부도 몸소 실천하겠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40여년 전부터 다섯 자식들에게 교육비만 줄테니 그 이후는 자립하라고 했다. 자녀들도 모두 동의했다.”

-백석초등학교에 애정이 큰 듯하다

“초등학교 때 농사일을 하며 자랐다. 상경해서 공부하고 여러 공직을 맡았지만 어린 시절 맡은 푸른 벼 냄새를 잊지 못한다. 호도 그래서 푸를 청에 벼 도(청도ㆍ靑稻)로 지었다.

농촌을 가 보면 젊은이와 어린이가 없다. 내 고향 농촌은 달랐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다. 백석초교는 내가 처음 도서관을 기부한 10년 전만 해도 폐교 위기였는데, 지금은 주변 도시에서도 학생이 오는 좋은 학교가 됐다. 내 뜻이 성공한 것이고 내 고향을 살린 것이라 생각한다.”

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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