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水害)의 고통

입력
2020.08.07 22:00
19면


지난 5일 수해 피해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소재 한 복숭아 농장에서 농민들이 수확을 앞두고 뿌리째 뽑힌 복숭아 나무를 정리하는 모습. 뉴스1

지난 5일 수해 피해가 발생한 경기 이천시 소재 한 복숭아 농장에서 농민들이 수확을 앞두고 뿌리째 뽑힌 복숭아 나무를 정리하는 모습. 뉴스1


며칠째 잠을 설쳤다. 폭우가 내리는 밤이면 나는 곧잘 가위에 눌린다.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해 보려 용쓰다 가까스로 깨어난 후에는 다시 잠들지 못한다. 1980년 여름 이후 40년째 계속되는 고질병이다. 수해(水害)의 경험은 그만큼이나 질긴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을 고통에 빠뜨린다.

그 여름, 폭우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아버지를 따라 들로 나섰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보니 아버지가 엄마를 안다시피 부축해 마루에 앉혔다. 엄마는 시퍼렇게 질린 눈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뭔가 큰일이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언니들이 엄마를 방으로 이끌어 팔다리를 주물렀다. 울음을 가까스로 참아 내던 엄마의 입에서 아픈 짐승의 신음 같은 소리가 났다. 바로 위 언니와 나는 아버지를 따라 산 위로 올라갔다. 찰방찰방 맑게 흐르던 집 뒤 냇물과 양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누런 황토물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 위쪽 냇가 둑을 따라 자리한 우리 논과 수박밭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견고했던 둑이 터져 냇물과 길과 논밭의 경계가 무너진 뒤였다. 무섭게 내달리는 황토물 위로 뿌리 뽑힌 통나무와 너덧 채의 원두막이 속절없이 떠내려갔다. 윗동네 어느 집 외양간을 홍수가 덮친 건지 물살에 휩쓸린 지붕 위에서 한 무리의 돼지들이 절망적으로 울어댔다. 아마도 우리 밭에서 자라고 있었을 수박과 참외가 넝쿨째 물 위로 떠올랐다. 설상가상 한번 무너진 둑은 쉬이 복원되지 않아 연 이태 더 홍수에 휩쓸리며 우리는 수해의 집중 타격을 받았다.

그 몇 년, 해외에 살던 친척까지 달려와 진흙과 돌투성이를 걷어내고 마른행주 짜내듯 온 가족이 감내했던 가난과 고생은 이제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 됐다. 하지만 늘 의연한 줄만 알았던 엄마의 울음과, 산 위에 선 채 황토물로 뒤덮인 논밭을 바라만 보시던 아버지의 절망적인 눈빛을 어떻게 잊을까. 그때 이후 폭우 소리가 창밖으로 들려올 때면 내 가슴은 방망이질치고 느닷없이 찾아오는 병처럼 잠에서도 가위눌린다.

장마전선이 중부 곳곳에 물 폭탄을 토해내던 엊그제,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언니네 농장 밭이 물에 잠기고 있다고 했다.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가니 10여 채의 비닐하우스가 물천지로 변해 있었다. 상류에서 밀려온 물이 높다란 둑 대신 배수로를 타고 삽시간에 역류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기거하는 집 바로 아래, 장독대 인근까지 쳐들어와 혀를 날름거리던 물은 하룻밤 사이에 냇물로 빠져나갔다. 집이 무사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말하는 혈육을 나는 달리 도울 게 없었다.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물에 잠긴 논밭들이 휙휙 지나갔다. 비는 곧 그치고, 공공은 수해보상금을 산정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하지만 농민들에게 주어지는 보상금은 늘 갓난쟁이 손바닥보다 작고, 보통 사람들이 가늠조차 못 하는 후유증은 고스란히 피해 농가의 몫으로 남는다. 지금부터 내년 봄까지, 그들은 수확의 보람 대신 썩어 버린 작물을 거두고 진흙을 걷어 내고 돌과 자갈을 주워 내느라 하루하루 고통스러울 것이다. 불쑥불쑥 치솟는 무력감과 분노, 당장 생계를 위협하는 궁핍과 사투를 벌이느라 지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며 쿵쿵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는 이 무력감을 또 어째야 하나.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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