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에서 엿보는 오리엔탈리즘과 서구 우월주의

입력
2020.08.06 14:28
수정
2020.08.06 18:00
21면
장-마르크 나티에,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는 마드모아젤 드 클레르몽', 1733, 캔버스에 유채, 월리스 컬렉션, 런던

장-마르크 나티에, '노예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는 마드모아젤 드 클레르몽', 1733, 캔버스에 유채, 월리스 컬렉션, 런던



이 그림은 프랑스 궁정 여인들의 매혹적인 초상화로 유명한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마르크 나티에(Jean-Marc Nattier)의 작품으로, 프랑스 귀족 여성과 그녀의 목욕 시중을 드는 흑인 하녀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화가는 초상화의 주인공 마드모아젤 드 클레르몽을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노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술타나(sultana: 이슬람 왕조의 여성 군주, 혹은 술탄의 왕비나 정부)로 묘사한다. 그녀의 발 밑에는 화려한 무늬의 진홍색 터키 양탄자가 깔려 있어 호화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경 오른쪽의 흑인 노예는 주인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욕조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고, 그 옆의 하녀는 여주인의 옷자락을 정돈하고 있으며, 왼쪽 흑인 아이는 값비싼 진주 목걸이를 받아 들고 있다. 당시 귀족 집안에서는 많은 흑인 여성들이 귀부인의 하녀로 일했고, 흑인 어린이는 애완동물 같이 다뤄졌다. 술타나로 그려지거나 흑인 노예의 시중을 받는 귀족 여성들의 모습도 초상화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궁정 문화를 이끈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퐁파두르도 초상화에서 자신을 노예의 커피 시중을 받는 술타나로 그리게 했다.

이 작품에서는 전형적인 서구 우월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할 수 있다. 주변에 흑인 노예들을 거느린 채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 귀부인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의식이 넘쳐 보인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점점 견고한 믿음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던 서구 우월주의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16세기에서 19세기 사이 대항해, 식민제국 건설, 과학혁명, 산업혁명에 이르는 유럽의 번영과 성공은 그들에게 인종적, 문화적 우월주의를 심어 주었다. 17, 18세기에는 아시아인과 흑인에 대한 백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종론이 등장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이비 과학 이론들도 등장했다. 이런 유사 과학이 서구 우월주의를 더욱 부추겼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편 술타나 복장의 귀부인과 이슬람 흑인 노예는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동방 문화에 대한 서구의 호기심과 선망, 즉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보여 준다. 오리엔탈리즘은 사실 동방 문화를 ‘우리’와 다른 ‘그들’로 타자화한 왜곡되고 허구적인 시각이자 서구 우월주의의 한 단면일 뿐이다. 서양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문명사회이며, 동양은 비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상한 세계라는 이분법적 인식으로 서구 우월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시작되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는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화하면서 서양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그 개념이 확장된다. 즉 서양인의 두뇌나 신체가 동양인보다 우월하며 동양 문화는 서구 문화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고 선진 문명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수 세기 동안 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근대사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 서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신종 전염병이 유럽 국가들과 그 후예인 미국의 위상을 흔들고 있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사회적 시스템에서 드러난 유럽, 미국의 치부와 한국을 비롯한 대만, 싱가폴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월성이 비교되면서, ‘선진국 유럽’ ‘세계 최강국 미국’이라는 인식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서구 우월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을 위시한 동북아권으로 세계사의 중심이 이동할 것이라는 미래학자들도 있다. 견고한 성채처럼 보였던 이른바 선진 문명의 신화 붕괴에 놀라움이 섞인 쩌릿한 쾌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약소국으로서 겪어 왔던 오랜 침략의 역사와 식민시대, 분단,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불행한 현대사로 인해, 그동안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패배주의적인 사고에 빠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밀려드는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서구 우월주의가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내면화되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서구적’이란 말은 과학적, 합리적, 세련된, 고급한 것과 관련된 그 무엇, 반면 우리 것은 뭔가 촌스럽고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되는 의식의 식민화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세계인에게 한류 문화, 스포츠 강국, 경제대국, BTS와 삼성, LG를 가진 일류 국가로 인식돼 있다. 코로나19는 세계에 한국의 현주소를 알리는 또 하나의 기회였고, 우리에게는 서구 세계에 대해 쪼그라들었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서구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고, 우리 사회의 ‘국뽕’ 열기도 만만치 않다. ‘국뽕주의’ 역시 또 하나의 신화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오랜 콤플렉스에 찌든 우리의 의식을 치유할 ‘국뽕 주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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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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