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안식처라 부를 수 없는 사회

입력
2020.08.04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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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렌시아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소가 잠시 쉬는 곳을 뜻하는데요, 최근에는 바쁜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나만의 휴식처로 변용되어 사용됩니다. 즉 바쁜 일상, 마음이 쫓기는 듯한 하루 속에서 잠시나마 나를 ‘나’로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안식처, 나만의 아지트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이 하나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사람의 정신건강 상태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내내 긴장 상태로 정신이 이어지다 보면 짜증과 공황, 나아가서 질환적 상태에도 이를 수 있지요.

저는 상담하는 것이 본업이니까, 평소에 이 ‘케렌시아’가 있는지 내담자에게 자주 묻습니다. 그런데 인상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집’이나 ‘내 방’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요즈음은 ‘카페’ ‘도서관’ 등 공용시설을 말하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특히, 34세 이하의 청년층이 특히 그렇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안식처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더군요. 그래서 청년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집에서는 온전한 휴식이 어려운가요? 이유가 뭘까요?”라고요.

어떤 응답들이 있었을까요? 휴식하기에는 너무 좁다, 옆집 소리가 다 들려서 완전히 혼자가 되기는 어렵다, 이상하게 마음이 더 우울해진다… 다양한 답변들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제가 한 번 더 물었지요. “카페나 도서관은 오롯이 자신만의 공간이 아니라서, 오히려 불편하진 않나요?”라고요. 제 질문에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요. 어차피 집도 제 공간은 아니잖아요. 집주인 꺼지.” 그리고는 “커피숍은 5,000원을 내면, 그 시간만큼은 어쨌든 쾌적한 공간에서 제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잖아요”라고 덧붙였지요. 5,000원을 내고 앉아 있는 카페는 편한데, 왜 그 가격의 100배에 달하는 월세를 내고 있는 공간은 휴식을 주지 못하는 걸까요. 아마도 ‘불안’을 야기하는 공간이어서는 아닐까요?

상담이 끝난 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습니다. 상담 시간에 시니컬하게 툭 던지던 한 청년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근데 선생님은 자가에 사신다면서요. 근데 쌤마저도 집이 휴식처가 아니에요? 왜요?” 상담 시간 당시에는 그 친구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그냥 웃어주었습니다. 왜냐고요? 솔직한 말을 꺼내자면 아마 이런 내용일테니까요. “난 전세 사기를 눈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어서 그게 무서워서 출퇴근 5시간의 거리를 무릅쓰고 먼 곳에나마 무리해서 산 거거든요? 근데 막상 집을 산 이후에는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틈날 때마다 우리 동네 시세를 검색해보며 오르는지 떨어지는지 끝없이 긴장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래서 내게도 집은 휴식이 아니라 ‘불안과 욕망’이네요.” 차마 이 말을, 그들에게 건넬 수는 없더라고요. 집을 가진 사람도, 가지지 못한 사람도 불안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을 말이지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가요? 휴식처인가요? 마지막 동아줄인가요? 혹은 영혼을 끌어 모은 원기옥인가요? 언제 밀려날지 모르는 ‘거처’인가요? 언제쯤 우리사회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정말로 안식처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을까요?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요?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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