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즈버그의 암 재발이 가르쳐 준 것

입력
2020.08.06 04:30
수정
2020.09.02 22:37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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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이 지난해 9월 12일 워싱턴 조지타운대 법학센터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해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이 지난해 9월 12일 워싱턴 조지타운대 법학센터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해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연방 대법원의 87세 최고령 대법관이자 진보의 상징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다섯 번째 암 발병 소식에 울컥했다. 긴즈버그는 1999년 대장암, 2009년 췌장암, 2018년 폐암, 2019년 다시 췌장암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런 그가 지난달 17일 성명을 내고 "지난 2월 건강검진에서 간에 이상이 나타나 5월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미 언론은 그가 쓴다는 항암치료제 젬시타빈을 근거로 지난해 걸린 췌장암이 간으로 전이된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은퇴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제다.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하면 5대 4로 보수 우위인 대법원의 균형추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권 행사로 보수쪽으로 완전히 기울 수 있다. 미 언론이 그의 건강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그래서다. 더욱이 여성 인권을 위해 오랜 기간 분투해 온 상징적 존재이자 학업과 육아, 남편 병간호까지 병행한 그의 인생 여정에 열광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의 암 재발 소식에 내가 울컥한 이유는 따로 있다. 6년 전 후두암 수술을 받은 아버지가 한 달 전 담도암 진단을 받았다. 이번에는 전이 부위도 여럿이라 했다. 아버지가 쓰는 항암치료제 중 하나도 젬시타빈이다. 긴즈버그처럼 사회를 통째로 바꾸는 역사적 판결을 내리는 지위에 있지는 못해도 가난하게 태어나 두 자녀의 성장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산 점은 공통적이다. 로이터통신은 긴즈버그의 암 재발 소식을 전하면서 "전이성 췌장암 환자의 평균 생존기간은 10~11개월이지만 긴즈버그가 이미 11년 전에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을 감안하면 그는 이미 확률을 이겼다"는 전문가의 분석을 소개했다. 이 대목을 읽고 또 읽었다. 암의 기수 진단이나 기대 여명 예측은 통계일 뿐이라고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아버지의 암 진단과 긴즈버그의 투병 사실 공개 이후 내게는 일상의 '뉴노멀(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우선 몸의 기능과 구조에 관심이 많아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문을 닫았던 공공도서관이 재개방되자마자 해부학 교양서를 빌렸다. 고백건대 학창시절 생물 시험 점수를 잘 받으려고 장기 이름을 외운 것 외에는 내 몸을 이해하려 애써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질병과 노화ㆍ죽음을 사색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무수한 타인의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하는 뉴스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죽음이라는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길 주저해 왔던 것 같다.

코로나19와 함께 맞는 세 번째 계절이자, 사상 유례 없는 최장 장마로 홍수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길고 힘든 느낌이다. 정부가 정책 목표 달성의 성패 여부를 떠나 부동산 정책 추진에만 매몰돼 있는 동안 삶과 죽음을 가르는 중요한 경계 지점들이 간과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늘 같은 지역에서 같은 홍수 피해가 발생하고, 배수로 개선 문제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지만 요 며칠 접한 뉴스 중엔 부동산법을 둘러싸고 고성과 야유를 주고받은 정치인들의 잔상만 기억에 남는다. 아쉽게도 우리에겐 암 치료를 받고도 "살아 있다" 외치며 업무에 복귀하는 긴즈버그 같은 관료는 없지만 그래도 모두 묵직한 삶의 무게를 꿋꿋하게 견뎌 냈으면 좋겠다. 아버지도 꼭 암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리라 믿는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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