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체육에 묻는다

입력
2020.07.22 04:30
26면

최숙현 선수 동료(오른쪽)가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 최숙현 선수 사망 관련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참석을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최숙현 선수 동료(오른쪽)가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 최숙현 선수 사망 관련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참석을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우리는 태극기를 가슴에 단 선수들의 투혼에 박수를 보내며, 그들이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역사에 울고 웃었다. 대한민국 체육의 정수이자 바람직한 체육개혁의 비전과 방향성은 바로 그곳에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이 나왔을 때 이를 반박하기 위해 대한체육회 경기단체협의회가 배포한 성명서 서두의 글이다. 성명에는 이번에 문제가 된 대한철인3종협회를 포함해 대부분의 경기단체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스포츠혁신위의 총 7번에 걸친 권고안이 엘리트 체육의 폐해를 침소봉대해 그 가치를 폄훼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체육계는 현장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역기능만 강조한다며 들끓었다. 혁신위가 출범한 이유가 자정능력이 부족한 체육계 자체에 있음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소수 엘리트만이 아닌 뒤처지고 탈락한 수많은 선수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새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권고를 그들만의 견고한 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받아들였다.

자정과 개혁의 요구를 귓전으로 흘리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건 코앞으로 닥친 도쿄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개최국 일본에 우리가 크게 밀리면 거센 비난이 일 것이라고 걱정의 화살을 돌렸다.

국민들은 더 이상 선수를 짓밟아가며 얻은 메달이 필요 없다는데, ‘투혼’과 ‘자랑스러운 역사’가 먼저인 그들에겐 여전히 성적이 가장 중요했다. 어쩌면 메달 몇 개로 개혁의 목소리를 덮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요구에 망가진 문고리 하나만 고치면 된다고 버텼다. 혁신위 권고안에 대해 체육계가 강하게 저항하고, 문체부가 의지를 보이지 않으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철인3종 최숙현은 극단의 선택으로 내몰렸다. 지난해 혁신위에 참여했던 인사는 “그 권고안만 잘 따랐어도 최숙현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고 분노했다.

전문가들은 성적지상주의와 체육계 기득권의 견고한 카르텔이 스포츠 폭력을 조장하고 또 눈감게 했다고 지적한다. 최숙현 선수의 비극도 전국체전 등의 성적에 따라 지자체로부터 예산이 배정되는 실업팀 운영의 불합리한 구조에서 비롯됐다. 어떻게든 성적을 내야 팀이 유지되니 지도자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다.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이 절실했던 옛 시절 국가가 지자체에 선수 육성을 대행시켰던 구시대의 유물이 지금껏 이어져온 것이다. 사실 대다수 국민들은 전혀 관심 없는 전국체전인데도 모든 체육단체와 팀들은 여기에 목을 걸고, 선수들은 그 틀 안에서 여전히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학교체육의 정상화와 전국체전의 개혁 등 큰 그림이 그려져야 하는 이때 대한체육회는 스포츠폭력 추방 특별조치라며 다중 감시체제 구축, 신고 포상제, 합숙 허가제 등 미봉책만 내놓고 있다.

지난 6일 최숙현 선수의 동료들은 국회를 찾아 “감독과 특정 선수만의 왕국이었다. 폐쇄적이고 은밀하게 상습적인 폭력 폭언이 당연시돼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들은 “고교를 마치고 처음 발 디딘 곳이었다. 억압과 폭력이 무서웠지만 그런 게 운동선수들의 세상이고 사회인 줄 알았다”며 울먹였다. 아직도 많은 선수들이 그 왕국에 갇혀 울고 있을지 모른다.

최숙현 선수는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달라’고 유언했다. 한국의 엘리트 체육에 묻는다. 진정 잘못이 없는가.

이성원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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