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스트라고 생각하면 웃을 수 있다

입력
2020.07.17 16:20
수정
2020.07.17 18:58
22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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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잠에 들려고 하는데 옆방에서 자는 줄 알았던 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왜?”

박이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실에 뭐가 있어.”

잠이 다 달아났다. 덩달아 긴장한 채로 소리 낮춰 물었다.

“뭐? 사람이야?”

“모르겠어. 뭐가 돌아다녀. 들었어?! 방금도 소리 났어!”

나는 무겁고 단단한 '걸리버 여행기' 책을 챙겨 살금살금 거실로 나왔다. 여차하면 모서리로 찍어버리거나 얼굴 정중앙에 던져버릴 계획이었다. 휴대폰 플래시로 비춰 본 거실엔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박이 빗소리를 잘못 들은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니야. 진짜로 들었어. 소름끼쳐. 이슬아 같이 자자.”

“싫어.”

“제발, 내가 구석에서 잘게.”

“싫어. 네 잠옷 너무 야해서 더럽단 말야.”

“옷 갈아입을게 진짜 한번만 제발.”

박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간청을 해서 어쩔 수 없이 박의 좁은 매트리스 위에 몸을 눕혔다. 한참을 박이 똑똑히 들었다던 정체불명의 소리를 기다렸는데 들리는 건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소리뿐이었다. 박도 잘못 들은 것 같다며 머쓱해했다. 그런데 막 잠에 들려고 하는 순간!

‘토도도돗.’

거실바닥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눈이 번쩍 뜨였다. 어둠 속에서 겁에 질린 박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얼어 있는데 선명하고 이질적인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찍찍.’

나는 눈을 더 크게 떴고 박은 질끈 감았다.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쥐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윗집 주인아저씨한테 SOS를 요청했다. 아저씨가 창고에서 쇠파이프와 거대한 집게를 양손에 든 채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쥐 한 마리 잡는데 세간 살이 다 부서지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쥐의 안위도 염려되었다. 아저씨한테 잡히면 심하게 다치거나 죽을 것이 분명했다. 싱크대 밑을 뜯어내니 쥐똥이 있었다. 아저씨가 쥐똥을 골똘히 바라보며 쥐의 예상 이동경로와 습성 등을 중얼중얼 읊었다. 순간 싱크대 밑에서 ‘토토토톳’ 쥐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과연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가져온 무기를 다 집어 던지는 동시에 ‘뚜얿!’ 하는 요상한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나보다 뒤로 물러섰다. 쥐와 나와 아저씨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무래도 쥐가 아저씨 손에 잡혀 다치거나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쥐와 재미없는 숨바꼭질을 하다가 위층으로 돌아갔다.

빈집에 혼자, 아니 쥐랑 단둘이 남아 우두커니 서있는데 별안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시원의 집게벌레와 반지하의 바퀴벌레, 옥탑의 곱등이를 극복하고 드디어 1층으로 이사를 왔는데 이제는 쥐라니!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웃픈 상황이었다. 좀 전에 들었던 아저씨의 이상한 비명까지 머릿속에서 오버랩되어 한참을 막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생 최악의 짐처럼 느껴졌던 쥐의 침범이 바퀴벌레와 곱등이 다음으로 해결해야 하는 퀘스트처럼 느껴졌다. 다음 집엔 영화 '기생충'처럼 사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숨어 살 일은 없을 테니 지금 저 쥐가 퀘스트 중 끝판왕일 거라고 정신승리를 하며 인터넷에 '쥐를 생포하는 법'을 검색했다. 이왕이면 나에게나 쥐에게나 안전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퀘스트를 깨고 싶었다.



강이슬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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