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ㆍ정치구호 난무… '현수막 지옥' 된 대검 앞

입력
2020.07.16 04:30
서초동 법조타운 일대에만 현수막 150여개
문 대통령, 여권 핵심 비난 내용이 3분의 1
집회신고만 하면 30일간 게시 가능한 법령도 문제

대검찰청, 대법원 등 사법기관이 밀집한 서울 서초동 일대가 자극적인 정치구호를 담은 현수막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인근 직장인과 주민들은 과격한 문구가 담긴 현수막에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가 하면 운전자의 시야 확보에 지장을 줘 안전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6일 오후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바라본 대검찰청~대법원으로 이어지는 300m 가량의 도로 풍경. 울긋불긋한 정치 현수막으로 즐비하다. 거의 대부분 같은 문구를 인쇄한 현수막으로 '도배'돼 있다.


대검찰청 정문 앞 도로가 자극적인 구호를 담은 현수막으로 걸려 있다. 대검과 서울 중앙지검 사이를 가로지르는 반포대로는 보수단체와 진보단체의 정치세대결 현장이 된지 오래다. 검사의 실명과 사진(모자이크 처리)을 기재한 명예훼손성 현수막도 눈에 띈다.


보수단체가 내건 '윤석열 검찰총장'을 응원하는 커다란 현수막(왼쪽)과 진보 단체가 세운 '윤 총장은 사퇴하라'는 플랜카드(오른쪽 하단)가 시야에 나란히 보인다.


‘윤석열은 즉각 사퇴하라.’

‘검찰은 악마 윤미향을 구속하라.’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사이로 난 서초구 반포대로 일대가 온통 현수막 천지다. 가로 10m, 세로 3~4m를 훌쩍 넘는 초대형 현수막이 즐비하고, 죄수복을 입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형상화한 스티로폼 인형까지 등장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엔 윤 총장을 응원하는 화환이 줄을 잇고, 문재인 대통령의 얼굴을 영화 주인공 ‘조커’와 합성해 조롱하는 그림도 눈에 띈다.

대한민국 법조계의 심장이라는 서초동의 풍경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지지 세력과 비판 세력 간의 세 대결이 현수막 전쟁으로 번진 양상인데, 일반 시민들에게는 입에 담지 못할 선정적 구호와 맹목적 비방이 난무하는 ‘시각 공해’ 그 자체일 뿐이다.



대검찰청에서 서초경찰서로 이어지는 인도에 보수 단체 회원들이 보낸 '윤 총장 응원'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윤 총장을 지지하는 현수막과 규탄하는 현수막이 도로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지난 2일부터 일주일간 이곳에 내걸린 현수막을 세어 보니 총 150여개에 달했다. 서초경찰서에서 서초역에 이르는 500여m 구간에만 101개, 대법원 정문과 사랑의 교회 사이 300m 구간에도 48개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에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니,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여권 핵심인사에 대한 비방이 100여개로 가장 많았다. 반면, 수사 내용이나 법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한 ‘민원성’ 현수막은 10여개에 그쳤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 일대에서 1인 시위로 억울함을 호소해 온 이들 대다수가 '정치 현수막'의 기세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서초동 일대를 뒤덮은 '정치 현수막'은 2018년 사법 농단 사건 수사와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재판이 시작되면서 늘기 시작했다. '조국 사태'가 벌어진 지난해 8월부터 이 일대는 보수와 진보의 본격적인 '프레임 대결' 현장이 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의 현수막들이 뒤섞이며 정치 구호의 각축장이 됐고, 올 초 검찰과 법무부가 빚어낸 갈등 국면에서 정점을 찍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린 4월 이후부터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현수막까지 가세하면서 현수막 '과포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7일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던 보수단체 회원들과 진보단체 회원들이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경찰이 출동했다. 진보단체 회원들이 보수단체 현수막을 철거하고 자신들의 현수막으로 교체하려는 도중에 말다툼과 몸싸움이 일어났다.


지난 7일에는 윤 총장을 지지하는 보수단체와 비판하는 진보단체 간에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보단체인 '서울의소리'가 대검찰청 앞에서 윤 총장의 사퇴를 성토하는 집회를 하는 동안 보수 성향의 '자유연대' 측이 등장해 현수막을 걸기 시작하면서 욕설과 함께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출동한 경찰이 두 단체 사이에 펜스를 설치하면서 상황은 정리됐으나, 상대 진영 현수막을 기습적으로 철거하고 자기 현수막으로 교체하는 식의 ‘게릴라전'이 계속되고 있다.

현행 옥외광고물법에 따르면 집회, 시위가 열리는 지역에 한해 별도의 신고나 허가 없이도 최장 30일 동안 현수막을 걸어 둘 수 있다. 한 달꼴로 집회 신고를 반복하기만 하면 1년 365일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내용이나 규격에도 제한이 없다 보니 특정인에 대한 비방이나 욕설, 선정적인 내용의 현수막이 마구 등장한다.


진보단체 회원들이 설치한 '윤총장 사퇴'를 주장하는 플랜카드와 현수막들.


서울 중앙지방법원와 서울 중앙지검 정문으로 통하는 길목에 걸린 현수막. 검사의 실명과 사진을 그대로 공개했다. 이처럼 개인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 우려되는 경우에도 구청이 따로 손쓰는 것은 어렵다.



판사, 검사의 실명과 사진을 내거는 등 명예훼손이 명백한 현수막도 손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구청 관계자는 “현수막이 훼손돼 보행이나 교통을 방해하는 경우에 한해 제거할 수 있을 뿐, ‘내용이 부적절하다’는 이유만으로 철거에 나설 수는 없다”고 밝혔다. 심지어 현수막이 보행자의 시야를 방해해 교통사고 위험을 높이는 경우에도 임의로 철거할 수 없다. 집회, 시위 장소에 걸리는 현수막은 종류를 막론하고 '법적 보호대상'이기 때문이다.



서초대로에서 법원로로 이어지는 통로에 내걸린 현수막들. 검찰과 사법부 등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집회 신고만 하고 걸어 두는 ‘꼼수 현수막’이 상당하다. 서초구청 관계자는 “경찰에 접수된 집회, 시위 신고 내역을 확인하고 수시로 현장 단속을 나가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함부로 현수막을 철거했다가 ‘재물손괴’로 고소당하는 경우도 있다 보니 정비가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집회가 열리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현수막을 철거했는데 주최 측이 뒤늦게 나타나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 사이에 현수막을 떼버리면 어떡하냐”며 반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집회, 시위 장소를 ‘대검찰청 정문 도로’ 또는 ‘서울중앙지검 서문 앞 도로’ 등 모호하게 신고하는 것도 문제다. 실제 집회 장소가 ‘정문 앞’이더라도 400m에 걸쳐 수십 개의 현수막을 도배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달리 제재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지역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해도 구청은 임의로 철거하는 대신 시위 주최 측에 내용을 전달, 위치 변경을 유도하고 있다.


서울 중앙지검 정문 앞에 내걸린 현수막들의 모습.


보수단체가 내건 정권 비판 현수막들.


인근 직장인과 주민들은 현수막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호소한다. 주민 윤모씨는 “정치 선동적 문구를 볼 때마다 피로감을 느끼고 정서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며 서초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직장인 오모(25)씨 역시 “현수막에 적힌 표현들이 워낙 과격하다 보니 지나칠 때마다 불쾌감이 상당하다”며 “개개인의 의견이야 존중되어야 하지만, 비판도 최소한의 예의와 도리는 지키는 선에서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옥외광고물법 등 관계 법령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초동에 사무실을 둔 박모(38) 변호사는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는 인정하지만 법조인의 실명까지 버젓이 실려 있는 걸 보면 ‘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든다”며 “집회 시위상 필요한 현수막이라 하더라도, 그 규모와 설치 기간 등을 명확하게 설정하는 등 규제가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조작 총선 불복'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인 현수막이 대법원 정문 앞 맞은 편 도로 위에 나부끼고 있다. 박지윤 기자




정치적 구호를 담은 현수막들이 즐비해진 탓에 정작 '민원성' 현수막이 걸릴 입지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박지윤 기자
김주영 기자
전윤재 인턴기자
서현희 인턴기자
뷰엔
한국일보 뉴스 네이버 채널 구독하기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