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재발명

입력
2020.07.09 15:39
수정
2020.07.09 17:52
25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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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파 헨더슨이 쓴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에는 말 그대로 상상하기 어려운 동물들에 대한 소개가 실려 있다. 아이 얼굴을 한 양서류인 ‘아홀로틀’, 유니콘처럼 긴 뿔을 달고 있는 ‘마귀상어’, 우주에서도 살아남는 ‘곰벌레’. 그런데 이 목록 중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동물이 하나 있다. 바로 ‘인간.’ 이 세상에 제일 흔한 게 인간인데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라니. 하지만 언어와 음악을 성취해 낸 진화의 과정을 살펴보면, 인간 또한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헨더슨이 지적한 것 이외에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인 까닭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시간을 다루는 동물이라는 점이다. 언어 때문은 아니지만(인간은 언어가 없더라도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언어 덕분에 보다 손쉽게 시간의 축 위에 자신들을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인간은 시간을 잘라낸 후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인간은 시간의 발명가이다. 예를 들어 기업들은 일 년을 네 개의 시간으로 쪼갠 ‘분기’라는 시간을 만들어 사용한다. 학교에서는 ‘학기’ ‘방학’ ‘학년’이라는 시간이 유통된다. 

 이들 시간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즉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출근 시간만 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에는 신축성이 생겨서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 버스에 자신을 기꺼이 구겨 넣을 수 있게 된다. 근무 시간은 우리를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낼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근면 성실한 기계로 만든다(상사 앞에서만). 이렇게 시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의 정체성을 바꾸도록 주문한다. 시간의 요구는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도 적용된다. 행정기관이나 기업들은 구성원들에게 분기별 목표를 주고 그 일을 달성하라고 독려한다. 학교에서는 학기말이라는 시간을 만들어 시험을 보고 평가하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간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했다고 여기는, 사회를 구축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어김없이 자본이 끼어들어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부린다. 수면을 취해야 하는 밤을 배달 시간으로 ‘발명’해 새벽 배송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라. 그러나 이 시간들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철새와 연어는 자신들의 본능에 새겨진 자연의 시간을 따라 산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에게 9시까지 회사로 출근하라고, 2분기까지 얼마의 성과를 내라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물건을 분류하고 배달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인간이 만든 시간은 사회적인 발명품에 불과하다. 

이처럼 우리의 시간은 ‘자연’, 즉 ‘원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누구의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할 것인가를 놓고 끊임없이 싸움을 벌인다. 근래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싸움의 대상이 되는 시간은 ‘비정규’라는 말과 짝을 지어 나타나는 ‘임시’라는 시간일 것이다. 한국의 자본은 노동의 시간에 ‘임시’라는 꼬리표를 달아서 너무나 손쉽게 노동의 대가를 착복해 왔다. 거기다 더해 임시의 시간을 자격 없는 자들의 시간, 불필요하고 가치 없는 노동의 시간이라고 폄하하고 모욕했다.

그러다 코로나19의 시간이 끼어들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이 충돌하고, 인간의 시간이 패배하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자연의 시간은 우리가 발명한 시간의 경계를 비웃고 무너뜨린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그 잘난 ‘정규’의 시간은 덜컹거리고 잘 작동하지 않는다. 바이러스의 습격 앞에서 그나마 우리 사회를 버티게 해준 것은 ‘임시’의 시간을 사는 이들이었다. 

이제는 우리들이 발명한 시간에 대해 되돌아봐야 할 때다. 배달 노동의 시간, 돌봄 노동의 시간, 간호 노동의 시간, 모든 ‘임시’의 시간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우리가 발명한 시간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았는지 따져보고, 우리의 시간을 재발명해야 할 때다. ‘덕분에’ 따위의 말은 하지 말자. 시간 아깝게.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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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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