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차보다 못한 금융시장

입력
2020.07.01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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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금융정의연대와 사모펀드 피해자 공동대책위 관계자들이 30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사모펀드 책임 금융사 징계 및 배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정의연대와 사모펀드 피해자 공동대책위 관계자들이 30일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사모펀드 책임 금융사 징계 및 배상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차 출고 후 5년 동안 5만㎞ 정도 운행한 중고 승용차를 사러 사이트에 검색해 보니 시세가 1,500만원 내외이다. 이를 파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큰 사고도 없었고 소모품도 제때 교환해 1,800만원 이상 받아야 하는 차도 있고, 겉은 멀쩡해도 심하게 침수된 적이 있어 1,000만원만 받아도 좋겠다고 생각되는 차도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시장에 어떤 매물이 더 많이 몰려들까. 이런 질문을 파고들어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가 조지 애컬로프(70) 미국 버클리대 교수다. 그는 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이 공정한 거래를 방해한다고 말한다.

□ 금융도 정보 비대칭성이 심각한 시장이다. 회사채를 예로 들면 우량 기업일수록 회사채 발행 필요성이 낮아 발행 회사채가 적은 반면, 적자에 시달리는 기업일수록 회사채를 많이 발행하려 한다. 그런데 투자자는 각 회사의 속사정을 잘 알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양쪽이 믿을 만한 중재자가 필요하다. 금융시장에서는 개별 기업보다 금융사와 신용평가사 같은 중재자를 믿고 투자가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부는 중재자를 감시해 겹겹으로 금융소비자를 보호해야 한다.

□ 금융감독원은 1일 2018년 11월 이후 판매된 라임 무역금융펀드(1,611억원 규모)에 대해 판매사인 은행 증권사가 투자자에게 원금 전액을 반환하라고 결정했다. 금감원은 상품의 부실을 알면서도 “운용사는 투자제안서의 핵심내용을 허위로 설명하고, 판매사는 그 내용을 그대로 설명해 투자자의 착오를 유발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금감원이 금융투자상품 분쟁에서 100% 배상을 결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결정은 전체 피해액이 1조7,000억원에 달하는 라임펀드뿐 아니라 5조원 규모의 비슷한 사모펀드 피해자에게도 힘이 될 것이다.

□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의견이 많다. 정부도 내년 3월 시행될 '금융소비자'법에 불완전 판매 규제 대상 금융상품의 범위를 확대하고 규제를 위반한 금융사에 대해 피해 배상과 별도로 관련 수입의 최대 50%까지 징벌적 과징금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았다. 여기에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의 추가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여당도 이를 공약한 만큼 실현 가능성이 크다. 중고차 시장은 품질 인증제 도입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판매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어쩌다 금융 시장이 중고차 시장보다 신뢰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 지경이 됐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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