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턴 회고록에 화 나는 진짜 이유

입력
2020.06.29 18:00
26면
구독


조롱 살 만큼 어설픈 ‘한반도 평화외교’
내치 정책도 갈피 없는 ‘엇박자’ 만연
헛된 ‘선전’ 대신 정책 정합성 회복 절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조현병적 생각들(Schizophrenic idea)'이라고 폄하했다. 뉴시스 자료사진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조현병적 생각들(Schizophrenic idea)'이라고 폄하했다. 뉴시스 자료사진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조현병(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을 내뱉은 건 매우 무례한 일이다. 그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에서 망언이 나오는 건 지난해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만난 대목이다. 당시 정 실장은 “미국이 북한의 ‘행동 대 행동’ 제안을 거절한 것은 옳다”면서도 “김 위원장의 영변 핵시설 해체 의지는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 단계에 들어선 걸 보여 주는 의미 있는 첫걸음”이라는 문 대통령의 생각을 전했다고 한다.

볼턴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 해체 대가로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 자체를 ‘행동 대 행동’ 협상 전략이라 여겼다. 그래서 미국이 북한의 시도를 거절한 걸 잘했다면서도, 곧바로 영변 핵시설 해체 의지는 평가해야 한다며 ‘행동 대 행동’을 지지하는 듯한 상반된 태도를 취한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앞뒤가 맞지 않는 ‘조현병적 생각들(Schizophrenic idea)’이라는 독설로 폄하한 셈이다.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은 괴팍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방자한 무례에 핏대를 올리는 건  의미가 없다. 대신 회고록에서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부분은, 객관적으로 봐도 당시 문 대통령의 메시지는 기이한 모순처럼 비칠 여지가 충분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모순으로 비쳐진 원인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정부의 대북정책이 실제 앞뒤가 안 맞을 정도로 엉성하기 때문. 둘째, 정 실장이 ‘행동 대 행동’ 협상 거절에 대한 지지와, 북한의 영변 핵시설 해체 의지에 대한 평가 사이에 자리 잡은 대통령의 진의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안 된 얘기지만, 나는 정부의 대북정책 자체가 생각보다 어설플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실 현 정부 들어 앞뒤가 맞지 않아 도통 뭘 하자는 건지조차 모를 정책이 전개된 건 외교안보 분야뿐만 아니다. 정치권력은 상충될 수도 있는 다수의 가치를 국정 어젠다로 열거할 수 있다.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식이 한 예다. 그걸 모순이라고 할 순 없다. 일관된 원칙에 따라 우선순위를 구체적 정책에 적용해 시행하면 가치 상충은 질서 있게 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우선순위에 따른 질서화를 통해 정책의 정합성을 구축하는 조정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그 결과 정책은 종종 ‘중구난방’식이 됐다. 대기업 대신 중소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구축하겠다며 중소기업 육성책에 나섰으나, 최저임금 과속 인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며 규제혁신 목소리를 높였으나, 경직적인 지배구조개선 압박과 주52시간제 강행 등 친노동 정책의 급격한 도입으로 오히려 기업하기 힘든 나라를 만든다는 우려를 샀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간산업 구조조정 한다며 정부 지원금은 고용 유지에 우선 쓰라는 식도 빈번했다.

답답한 건 정책 난맥을 현실을 호도하는 정책홍보나 어설픈 ‘보여주기’ 이벤트로 어물쩍 넘기는 일이 되풀이 됐다는 것이다. 심각한 민간 실업을 공공부문 ‘취로사업’ 취업 통계로 분식하거나, 별 알맹이 없는 ‘대통령과의 사회적 대화’가 요란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규제혁신과 민간경제 활성화 요구가 빗발치면 어느 새 벤처 강소기업 같은 곳에 대통령이 나타나 혁신과 성장의 메시지를 천명하는 이벤트도 관례화했다.

2018년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를 함께 산책하는 모습에 정부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허약한 정책에 기반한 막연한 기대는 결국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교착에 빠트리고, 핵무력을 거의 완성한 북한이 거침없이 도발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볼턴 회고록에 화가 나는 이유는 그의 무례 때문이 아니다. 나중에 무슨 결과를 낳을지 걱정되는 중구난방 정책들이 여전히 국정 전반에 횡행하는 현실 때문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대체텍스트
장인철수석논설위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