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고대 조각, 그 백색 신화가 깨지다!

입력
2020.06.04 18:00
수정
2020.06.04 19:24
25면
‘색채의 신들’ 전에 전시된 ‘트로이의 궁수’, 기원전 500년경. (출처: Wikimedia) 미소니 레깅스 같이 보이는 패셔너블한 바지를 입은 이 궁수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로 추정된다
‘색채의 신들’ 전에 전시된 ‘트로이의 궁수’, 기원전 500년경. (출처: Wikimedia) 미소니 레깅스 같이 보이는 패셔너블한 바지를 입은 이 궁수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로 추정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주저 없이 흰색의 대리석을 떠올릴 것이다. 고대 조각들이 원래 알록달록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었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들어와서, 미술 관계자들은 실제 발굴 조사나 연구를 통해 고대 조각이 채색 조각이었다는 뜻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중 한 사람이 독일 고고학자 빈첸츠 브링크만이다. 조각상에 남아 있는 안료의 미세한 흔적을 찾아낸 그는 이것이 고대 조각이 채색되었음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그룹은 X-ray 형광 분석과 같은 여러 가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조각에 칠해져 있던 다채로운 안료의 색상을 알아냈다. 그리고 본래 색과 비슷하게 채색한 석고 및 대리석 복사본을 만들어냄으로써 고대 조각의 모습을 복원했다.

이 복제품들을 전시한 ‘색채의 신들(Gods in Color)’ 전시회는 2003년에서 2015년까지 13년간 전 세계를 순회하며, 고전 조각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고대 조각이 흰색의 대리석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던 관람객들은 뜻밖의 채색 조각에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교과서나 미술관에서 본 백색 조각은 역사상 가장 놀라운 거짓말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색을 중요시했으며, 그들의 신을 화려한 색채로 장식하기를 좋아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대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조각을 채색했다. 고대 조각상들의 옷, 머리카락, 입술, 피부 등은 밝고 생생한 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눈은 색색의 돌이나 유리, 상아 등으로 상감되기도 했다. 때로는 보석과 금속으로 만든 귀고리나 목걸이 등으로 장식되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고대 조각이 무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색채의 신들’ 전에 전시된 BC 6세기 페플로스의 코레와 2000년대 복원된 코레 (출처 Wikipedia)
‘색채의 신들’ 전에 전시된 BC 6세기 페플로스의 코레와 2000년대 복원된 코레 (출처 Wikipedia)

백색 조각의 신화는 고대 조각상이 발굴된 르네상스 시대에 탄생한 것이다. 조각상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비바람에 색이 벗겨져 발굴 당시 흰색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애초부터 백색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대 문명을 동경했던 르네상스인들은 흰색 조각이 고전 조각의 특징이며 이상적인 미를 구현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무색의 조각은 모든 예술가들이 따라야 할 고전 미술의 표준이 되어버렸다.

미켈란젤로 역시 16세기에 발굴된 흰색 대리석 조각 벨베데레 토르소나 라오콘 군상 등을 흠모한 나머지 대리석 산지 카라라까지 가서 흰 대리석을 직접 구입해 로마로 가져갔다. 고전 조각이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으로 채색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들을 자연의 색으로 남겨 두었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상적 고전미의 허상을 쫓았단 말인가!

또한, 백색 조각의 환상이 서구 미술에서 확고히 굳어진 데는 18세기 독일 미술사가 요한 요하임 빙켈만의 공이 크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백색 조각이 완벽한 조형미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빙켈만은 고대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보고 고전 조각이 채색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흰 것일수록 아름답다’라는 자신의 미학 이론을 깨기 싫었던 그는 채색 조각들이 그리스 조각이 아니라 이전 문명인 에트루리아의 것이라고 결론지어 버린다. 애써 진실에 고개를 돌린 것이다.

19세기 초에 와서, 고대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고대 신전의 부조와 조각상들이 선명한 색상으로 채색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그 누구도 수 세기 동안 유럽의 미학 체계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백색 신화를 깨려 하지 않았다. 고고학자와 박물관 전시기획자들은 고대 유물의 색의 흔적을 외면했고, 전시 전에 조각상의 흙이나 먼지를 말끔히 털어냈으며, 이 과정에서 그나마 남은 색은 더욱 제거되었다. 심지어 백색 조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대 조각의 채색을 주장하는 이들은 해고되었다. 이리하여, 채색 조각의 비밀은 오랫동안 베일 속에 가려졌다.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랑한 거짓말, 백색 신화는 깨졌다. 고대 조각이 채색되었다는 것은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학설이다. 그러나 관람객들은 키치(kitsch: 천박하고 조악한 모조품, 혹은 대량생산된 싸구려 상품)의 느낌을 주는 복원 조각들 앞에서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것이다. 물론 복제 모형의 색상이 고대의 그것과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다. 원작이 복원 조각에서 보이는 조잡한 색채가 아니라 세련된 채색 기법으로 제작되었기만을 바랄 뿐이다.

백색 조각의 신화는 눈앞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거부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욕망과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술뿐이랴! 지금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믿는 그 모든 것들이 과연 그러할까?

김선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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