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가 누구길래…이백이 우한에서 절필을 선언한 까닭은?

입력
2020.06.06 10:00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41> 후베이성 ① 우한 황학루 

이백이 우한의 황학루 암벽에 쓴 ‘장관’ 글씨. ‘장’자 오른쪽의 점은 훌륭한 경관에 시인의 감성을 담은 일종의 감탄사다.

후베이성은 동정호 북부에 위치하며 장강이 관통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봉쇄됐던 우한이 성도다. 중국의 강남 3대 누각인 황학루가 있는 우한,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찾아간 샹양, 관우가 지키던 징저우, 싼샤댐으로 유명한 이창과 대협곡이 있는 언스까지 네 차례에 나눠 발품 기행을 떠난다. 물론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 다녀왔다.

예로부터 우한(武漢)은 구성통구(九省通衢)로 알려졌다. 통구는 사통팔달의 중심지를 뜻하니 9개 성으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장강을 따라 서쪽 상류로 가면 파촉(巴蜀), 동쪽 하류로 가면 오월(吳越), 지금의 한강인 한수(漢水)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예섬(豫陝), 동정호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 상계(湘桂)에 이른다고 했다. 중국 어디라도 쉽게 접근이 가능한 교통과 물류의 도시다. 중국 정부가 코로나19 초기에 긴장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1949년 5월 우창, 한커우, 한양을 통합해 대도시가 됐다.

장강을 끼고 발달한 우한은 여름 기온이 섭씨 40도에 이르고 습도는 90%가 넘는다. 충칭, 난징과 함께 중국 3대 찜통 도시다. 우한 기차역에서 버스로 약 30분을 이동해 우창구에 위치한 황학루(黃鶴樓)로 간다. 웨양의 악양루, 난창의 등왕각과 함께 강남 3대 누각이다. 우창은 삼국시대 적벽전투에서 승리한 오나라가 ‘무(武)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 번창한다’는 취지로 정한 지명이다. 봉건 제국 청나라를 멸망시킨 신해혁명이 일어난 도시이기도 하다. 1887년 삼민주의자인 쑨원은 혁명 이후 첫 수도를 우창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공예품 거리인 황학고사와 멋스러운 유지산(기름 먹인 우산).

황학루는 야트막한 사산(蛇山)에 위치하고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공예품과 토산품을 파는 골목이 하나 있다. 황학고사(黃鶴古肆)라는 이름인데, 사(肆)는 일종의 대문자로 은행권에서 사용하는 사(四)와 같지만 ‘점포’라는 뜻도 있다. 옛날 분위기에 맞는 상품을 판다는 의미다. 가게 사이로 연한 빛깔의 유지산(기름 먹인 종이 우산)이 두 줄로 하늘을 향해 걸려 있다. 아래에서 바라보니 햇살을 받아 투명하면서도 은은한 색채를 띠고 있는 모습이 황홀하다.

북송의 화가 미불의 서체 ‘천하강산제일루’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미불 동상.

남문 벽돌에 새긴 ‘천하강산제일루(天下江山第一樓)’ 글씨체가 낯익다. 무당산에 쓴 ‘제일산’의 필체와 같다. 북송 화가이자 서예가인 미불(米芾)이 황학루를 다녀갔다. 그는 필체를 남긴 후 황학루에 있던 바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갑자기 형님이라 불렀다. 이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인데 사람들은 미불을 석치(石癡)라고 했다. 미치광이 행동과 기행이 많았던 화가에 대한 애칭이다. 안에 들어가니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미불배석(米芾拜石) 동상과 만난다. 얼핏 보면 바위처럼 생겼는데, 후베이 출신의 현대 조각가 샹진궈의 작품이다.

왕희지의 거위 이야기가 담긴 연못 ‘아지’.

작고 아담한 연못인 아지(鵝池)가 있다. 어느 날 명필 왕희지가 황학루에서 서생들과 거위에 관해 이야기했다. ‘날짐승 중 호걸이고 눈처럼 희며, 구슬처럼 깨끗하고 한 점 티끌도 없다’라고 거위를 흠모하고 땅 위에 ‘아(鵝)’자를 썼다. 이 글자를 좋아한 서생이 매번 모사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글자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연못을 만들었다. 거위를 기르고 신비로운 자태를 관찰했는데 완벽하게 글씨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연못 위에 거위 몇 마리가 노닐고 있다.

백룡지 연못 뒤로 나무에 가린 구구귀학도.
구구귀학도 시작 지점의 ‘귀학(歸鶴)’ 필체.

아지와 연결된 백룡지(白龍池)도 있다. 길이 38.4m, 높이 4.8m에 이르는 붉은 부조(돋을새김)가 있는데,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쓰촨 남부 량산이족자치주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수십 명의 석공이 2년 6개월에 걸쳐 제작했다. 99마리의 학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어 구구귀학도(九九歸鶴圖)라 부른다. 그림이 시작되는 지점의 ‘귀학’ 필체는 1960년 당시 중앙미술학원 부원장인 류카이취가 썼다. 한꺼번에 보기에 너무 길다. 황학루의 학은 도대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이다지도 학의 천국이란 말인가.

마오쩌둥 사정(詞亭).

마오쩌둥의 ‘말씀’을 새긴 비석과 정자가 있다. 1927년 봄 장제스의 정변으로 암울한 시기에 황학루를 찾은 마오쩌둥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빗대 당시 상황을 한탄했다. ‘황학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가?’라고 반문하고, ‘파주뢰도도(把酒酹滔滔), 심조축랑고(心潮逐浪高)’라고 했다. 그의 필체는 독특해 세심하게 뜯어보게 된다. ‘술을 땅바닥에 뿌리니 굽이굽이 요동치고 마음은 파도처럼 격정이 솟구친다’는 말이다. 마지막 대목을 보니 그의 심경이 어땠을까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정자를 따라 낮은 산을 오르니 황학루를 다녀간 문인들이 남긴 비문이 이어지고 있다. 누구보다 대표 인물은 이백이다. 암벽에 쓴 ‘장관(壯觀)’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면 ‘장(壯)’자 오른쪽에 점 하나를 찍었다. 경관이 아주 아름답다는 감탄의 의미다. 이태백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발상을 할 수 있겠는가? 얼핏 보면 중국 건국 후 만든 간체와 비슷한 ‘장(壮)’이라 오해할 수 있는데 해서(楷書)다. 이백은 산시성 항산에 있는 현공사에도 이처럼 획을 추가한 글씨를 남겼다. 온통 은유와 상징을 머리에 담고 사는 시인만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백이 붓을 놓게 만든 최호의 시가 새겨진 그림.

이백과 동시대 시인인 최호가 황학루에 왔다. 불후의 명작 ‘황학루’를 남겼다. 최호제시도(崔顥題詩圖)라 부르는 부조가 있다. 장관에 도취한 이백은 최호의 시를 마주하고, ‘눈앞에 펼쳐진 모습을 보니 말조차 하기 어렵네(眼前有景道不得), 최호의 시만이 머릿속에 맴도네(崔顥題詩在上頭)’라고 탄식하며 절필을 선언했다고 전한다. 바로 옆에 절필한 장소라는 각필정(擱筆亭)을 세웠다. 최호의 시는 긴 소매를 휘날리며 꼿꼿한 자세로 구름을 따라가듯 붓을 들고 노래하는 모습과 함께 새겨져 있다. 연한 녹색을 머금어 일필휘지의 생생함이 느껴진다.

‘선인은 황학을 타고 날아가고, 여기 황학루만 쓸쓸히 남았구나(昔人已乘黃鶴去,此地空餘黃鶴樓). 황학은 가더니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이 천년을 유유히 지키네(黃鶴一去不復返,白雲千載空悠悠). 맑은 물은 한양의 나무에 넘치고, 풀 향기는 앵무새 노는 섬에 가득하구나(晴川歷歷漢陽樹,芳草萋萋鸚鵡洲). 날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란 말인가, 안개 자욱한 수면이 시름에 잠기게 하네(日暮鄉關何處是,煙波江上使人愁).’

최호의 시에 등장하는 황학을 타고 날아간 선인은 누구란 말인가? 중국 역사에는 학을 타고 날아간 인물이 많다. 중국 소설의 기원으로 알려진 은운(殷芸, 471~529)은 30여권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인 ‘소설(小说)’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양주 관리가 되고 싶다는 사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사람, 게다가 학을 타고 훨훨 날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전대에 돈을 가득 넣고 학을 타고 양주로 가고 싶다(腰纏十萬貫, 騎鶴下揚州)’고 했다. 돈과 명예, 학은 복록수(福祿壽)를 상징한다. 양주지학(揚州之鶴)은 이를 다 누리고 싶다는 소망이다.

남송의 무장, 악비 동상.
역동적으로 표현한 악비와 말 동상.

산 오른쪽 끄트머리에 악비(岳飛) 광장이 있다. 말 한 필과 함께 높이 8m에 이르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금나라의 침공에 항거한 영웅 악비의 기상이 잘 드러나 있지만, 전쟁터를 누빈 말의 모습도 역동적이다. 왼발을 당기고 오른발을 힘껏 내달리는 듯하다. 휘날리는 꼬리, 살짝 숙인 머리는 정면을 응시하고 당장이라도 질주할 태세다. 악비는 송나라 고종과 군마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는다. 좋은 말은 뭐든지 잘 먹고 마시며 하루 200리를 달려도 땀이 나지 않아야 준마라고 의견을 개진했다. 이 문답을 정리한 글인 ‘마량대(良馬對)’는 악비 전기인 ‘금타졸편(金佗稡編)’에 나오는데 손자이자 문학가인 악가(岳珂)가 편찬했다. 정사인 ‘송사(宋史)’에도 전하고 있다.

전투 중인 악비군 벽화
악비정(왼쪽)과 악비공덕방.

악비 벽화, 악비정과 악비공덕방(岳飛功德坊)도 있다. 공덕을 기리는 패방은 높이 10.7m, 너비 7m로 네 개의 기둥과 다섯 개의 기와로 이뤄져 있다. 기둥마다 두 마리씩, 모두 여덟 마리의 사자가 조각돼 있고 들보 윗부분에는 용이 새겨져 있다. 앞뒤로 공업천추(功業千秋)와 정충보국(精忠報國) 글자를 새겼다. 악비는 호북선무사로 근무하면서 금나라에 맞서 싸워 그 업적이 천추에 빛난다. ‘송사’에도 언급된 ‘정충’은 나라를 위한 순수한 충정을 뜻한다.

여름 패방 ‘하화송향’과 겨울 패방 ‘은주호탕’

악비공덕방을 지나면 네 개의 패방이 50m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다. 황학루의 사계절을 상징한 사계패방이다. 앞면과 뒷면에 편액이 걸렸는데 네 명의 시인이 지은 시가 출처다. 연요학루(煙繞鶴樓)와 녹만고관(綠滿高觀)은 당나라 이군옥의 시에서 인용했는데, 운무와 녹음이 우거진 봄의 모습이다. 하화송향(荷花送香)과 죽로적청(竹露滴清)은 여름의 연꽃과 대나무 향기를 노래한 당나라 맹호연의 시에서 인용했다. 당나라 백거이의 시에서 가져온 백화랑천(白花浪濺)과 홍엽임롱(紅葉林籠)은 하얀 꽃과 붉은 잎이 흐드러지게 핀 가을의 모습이 상상된다. 원나라 말기와 명나라 초기에 활동한 시인 양기는 옥처럼 순결한 은빛의 겨울을 옥수참차(玉樹參差)와 은주호탕(銀洲浩蕩)으로 노래했다.

그외관 공사 중인 황학루와 보동정.

고개를 넘으니 황학루의 위용이 드러난다. 황학루는 외관 공사 중이다. 223년 삼국시대 오나라가 처음 건축했다. 삼국시대 악주(鄂州)가 바로 이곳이다. 오나라는 서쪽으로 유비의 촉나라, 북쪽으로 조조의 위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군사 목적의 누각이 필요했다. 통일 왕조가 들어서자 문인, 상인, 여행객이 즐겨 찾는 누각이 됐다. 황학루는 지금까지 10차례의 훼손과 중건을 반복했다. 1868년 청나라 동치제 때 황학루를 중건하면서 꼭대기에 높이 3.4m의 보동정(寶銅頂)을 세웠다. 그런데 16년 후인 1884년에 화재로 홀랑 타버렸다. 청동으로 만든 보정만이 남았다. 지금 건물은 1985년에 다시 중건됐다.

황학루 1층의 백운황학도와 5층에서 본 장강대교
황학루를 다녀간 인물도.
황학루 공예품 가게에서 서예 작품 부채를 제작 판매하고 있다.

1층 벽면에 구름에 휩싸인 황학루와 하늘을 비상하는 황학을 그린 백운황학도(白雲黃鶴圖)가 펼쳐져 있다. 신선이 학을 타고 날아와 머문 지점에 황학루를 세웠다는 전설을 토대로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피리를 불며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신선이 학을 타고 있다. 5층에 올라가니 흘러가는 장강과 대교가 발아래 보인다. 정말 사방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요새로 손색이 없다. 각 층을 차례로 내려오는 동안 전시실과 공예품 가게를 하나씩 둘러볼 수 있다. 벽마다 전설이나 역사가 그림으로 새겨져 있다. 황학루를 다녀갔거나 인연이 있는 인물을 그린 벽화, 서예와 산수화도 많다. 한 화공이 부채에 그림이나 서예를 써서 팔고 있다. 악비나 손권 등 황학루와 인연이 깊은 사람들의 초상화가 새겨진 부채가 탐이 난다.

백운황학(왼쪽)과 황학귀래.

학 한 쌍이 다정하게 서 있다. 황학귀래(黃鶴歸來) 동상이다. 거북 위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고 그 위에 학이 있는 형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우왕이 치수를 하니 옥황대제가 거북과 뱀을 내려 보내 일을 도왔다. 이 모습에 감동한 선학 두 마리가 환골탈태해 속세로 내려오니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거워했다. 전설이 아니더라도 거북과 학 모두 장수를 누리는 동물이고 뱀도 영구를 상징한다.

황학루 광장의 ‘강산입화’ 패방
강산입화 패방 반대편의 ‘삼초일루’ 편액.

황학루 광장 앞에 강산입화(江山入畫) 패방이 있다. 1900년 우한에서 출생해 103세까지 장수해 백세노인이란 별명을 지닌 서화가이자 전각가인 황쑹타오가 썼다. 반대쪽에는 삼초일루(三楚一樓)가 적혀 있다. 삼초 지역의 유일한 누각이라고 황학루를 평가한 문구다. 우한은 기원전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 땅이었다. 초나라는 땅이 넓어 서초ㆍ동초ㆍ남초로 구분했다. ‘사기’ 화식열전은 세 지역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한서’ 고제기는 항우를 자립한 서초패왕이라 기록하고 팽성(지금의 쉬저우)을 서초라 했다. 지금의 난징 일대를 동초, 징저우인 강릉을 남초라 했다. 패방 앞에는 원나라 시대 승상보탑(勝像寶塔)이 자리잡고 있다. 아래는 둥근 받침대가 있고 그 위로 병, 바퀴 살, 우산 덮개, 봉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황학루 문밖에서 본 백탑, 패방, 누각.

정문을 나와 뒤를 돌아보니 백탑, 패방, 누각이 서로 다른 역사의 숨결을 지니고 나란히 줄을 서 있는 모습이다. 누각에서 바라본 장강, 숲이 우거지긴 했어도 야트막한 산의 평범한 공원이다. 그 옛날 문인이 쓴 시어와 감정이입을 한다. 비록 후세 사람이 만든 동상과 비석, 연못과 조경이 황학루의 참모습을 가리고 있지만, 시인의 정서가 운무처럼 쌓인 듯해 마음이 들뜨는 관람이다. 전설 속 선학처럼 한강이나 장강을 따라 훌훌 날아가고 싶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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