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혁명가 주세죽의 생애(6.2)

입력
2020.06.02 04:30
1928년 소련의 한 공원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주세죽과 박헌영. 위키피디아

주세죽(朱世竹, 1901.6.2~1953?)은 일제시대 중국 상하이와 소련에서 활약한 사회주의혁명가 겸 독립운동가지만, 활동 이력보다 박헌영(1900~1956)의 아내로 더 유명하다. 사실 그것도, 1932년 박헌영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연락이 끊긴 뒤 동지였던 김단야(당시 기혼)와 재혼한 일로 자주 환기되곤 했다. 당시 그 사건은 변절 못지 않게 충격적인 ‘스캔들’이었고, 시선은 여성 혁명가에게 더 모질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중등 시절 3ㆍ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살이를 하고,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피아노를 전공하던 20세의 주세죽은 현지 조선 혁명가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주세죽은 가족 동의 없이 1921년 박헌영과 결혼했다. 고려공산청년회 상하이지부 비서 박헌영은 당시에도 ‘위대한 청년 영도자’라 불리던 거물이었다.

주세죽은 ‘청년회’ 일 외에 허정숙ㆍ박원희 등과 함께 1924년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했고, 조선여성해방동맹을 결성했고, 1927년 항일 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했다. 그들에겐 조국 해방 못지 않게, 계급 해방과 여성 해방이 중요했다. 그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 손석춘의 ‘코레예바의 눈물’에는 주세죽이 또 한 명의 걸출한 혁명가 허정숙과 함께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 경찰이 여자라고 경계를 허술히 하는 것도 성차별’이라고 농담하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그는 조선민중대회 준비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26년 6ㆍ10만세운동 직후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주세죽과 김단야의 결혼은 당연히 축하받지 못했다. 박헌영ㆍ임원근과 함께 ‘상하이 트로이카’라 불리던 김단야였지만 주세죽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박헌영의 생존 사실을 숨겼다는 설이 있고, 둘 사이가 훨씬 전부터 심상치 않았다는 설도 있다. 확인된 바 없는 그런 소문들이 둘에겐 치명적이었다. 신뢰는 혁명가의 생명이고 여성에겐 절개가 신뢰의 생명이었다.

그는 1929년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박헌영과 가진 딸(비비안나, 무용가)을 낳았고, 1937년 ‘일본 밀정’이란 누명으로 소련 경찰에 체포됐다. 김단야는 처형되고 그는 카자흐스탄에 유배됐다. 주세죽은 해방 후에도 귀국을 허락받지 못하다가 유배지의 한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다 숨졌다. 2007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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