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복수의 화신 메데이아와 ‘부부의 세계’

입력
2020.05.14 18:00
수정
2020.05.14 18:34
25면
들라크루아, ‘자식들을 죽이려 하는 메데이아’, 1838년, 캔버스에 유채, 122 x 84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들라크루아, ‘자식들을 죽이려 하는 메데이아’, 1838년, 캔버스에 유채, 122 x 84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요즘 ‘부부의 세계’가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인 영국 BBC 화제작 ‘닥터 포스터’는 고대 비극 ‘메데이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당시 대형 야외무대인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상연된 이래,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식들을 살해한 메데이아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문학, 미술 작품에서 다루어진 소재다.

지선우와 닥터 포스터 모두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로서 이아손에게 모든 것을 바친 메데이아와 유사한 캐릭터다. 아내를 배신하고 외도를 저지른 남편 이태오와 사이먼 포스터는 둘 다 새 처가의 재력에 도움을 받는데, 이들 역시 코린토스 공주와 결혼해 장차 왕위를 차지하려는 이아손과 비슷하다. 그들의 아들 준영과 톰은 부모의 불화와 이혼으로 심각한 고통 속에서 방황한다. 이들은 메데이아의 아들들처럼 어머니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정신적 살해를 당한 셈이다.

메데이아는 왜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죽였을까? 신화에 따르면, 그리스의 왕자 이아손은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아르고 원정대를 조직해 흑해 연안의 콜키스로 떠난다. 마침내 이아손은 그에게 첫눈에 반한 마녀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황금 양털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버리고 코린토스 왕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하려고 하자, 그녀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코린토스의 왕과 글라우케, 그리고 자신의 두 아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자식들을 죽이려 하는 메데이아’는 아이들을 살해하기 직전의 메데이아를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여성의 파괴적인 힘, 자식을 살해하는 어머니의 극단적인 정신병리학적 심리를 섬뜩하게 보여 준 걸작이다. 단도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어 곧 그것으로 아들들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들라크루아는 살인의 현장을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외딴 동굴로 설정하고 선명한 명암 속에 인물들을 던져 넣음으로써 긴박한 감정을 극대화한다. 메데이아와 두 아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전형인 피라미드 구성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기묘하게도 죽은 그리스도를 무릎에 안고 있는 피에타를 연상시켜 기묘한 역설적 뉘앙스를 풍긴다.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의 행동에 공포를 느낀 아이들은 우악스럽게 그들을 틀어쥐고 있는 그녀의 팔뚝에 눌려 반항조차 못한 채 축 늘어져 있다. 오른쪽 팔에 매달린 아이는 거의 목이 졸려 있고, 왼쪽 팔 아래 엎드린 아이는 관람자를 향해 두려움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의 연약한 알몸의 분홍빛 피부색과 무죄를 상징하는 흰색 옷자락은 피와 폭력을 표상하는 메데이아의 진한 빨강과 갈색 옷과 대조를 이룬다. 참혹한 살육의 장소인 동굴과 대조적으로 동굴 밖에는 파스텔 색조의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녀는 사랑이 충만한 행복했던 과거를 마지막으로 힐끗거리며, 영원히 사악한 암흑의 세계로 떠나기로 작정한 것일까?

한편, 자식을 죽이는 비정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제쳐두고 그림 자체만 본다면, 들라크루아의 메데이아는 동굴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식들을 보호하려는 어머니 같이 보이기도 한다. 또한, 햇살이 동굴에 스며들어 메데이아의 얼굴 윗부분만 그늘지게 하는데, 그림자 속 그녀의 눈빛은 이아손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식들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의 두려움, 불안, 혼란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관람자는 메데이아의 의도가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을 느낀다. 바로 이러한 모호성과 불확실성이 작품을 아주 흥미롭고 매혹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어떤 이들은 메데이아를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본다.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가치관이 그녀를 악녀로 만들었을 뿐이고, 메데이아는 이아손의 부당한 대우를 철저하게, 그리고 정당하게 응징한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수많은 살인과 악행으로 볼 때, 원조 페미니스트라기보다 위험한 팜 파탈에 가까워 보인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남동생을 찢어 죽여 바다에 던지고 아버지의 마음을 산산조각 냈으며, 끝내 자식까지 죽인 메데아에게서는 강인함이 아니라 비틀린 집착과 자기애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지선우와 닥터 포스터는 어떤가? 분노와 복수심은 자신과 때로는 주변의 무고한 이들까지도 파괴하는 위험한 감정이다. 그러나 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 사랑과 증오, 질투와 복수의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질한 남편을 훌훌 털어내 버리고 그냥 자신들의 길을 갔으면 좋았겠지만...

김선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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