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협조자가 자진 제출한 휴대폰서 ‘별건 증거’ 뒤통수 친 검찰

입력
2020.05.11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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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캐슬, 사실은?] <17> 수사기관 ‘위법한 증거 수집’논란 

※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3억원대 뇌물 혐의, 성 접대 혐의와 관련해 1심 무죄를 선고받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지난해 11월 22일 오후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석방되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3억원대 뇌물 혐의, 성 접대 혐의와 관련해 1심 무죄를 선고받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지난해 11월 22일 오후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석방되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 수사의 핵심 참고인을 개인 비위 혐의로 별건(別件) 수사해 재판에 넘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김학의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참고인이 자진 제출한 휴대폰에 든 증거로, 이 참고인을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이 참고인은 본건 조사를 받는 동안 검찰이 별건을 거론하며 수사에 협조할 것을 압박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수사기관의 수사 방식을 둘러싸고 최근 종종 ‘위법한 증거수집’ 논란이 일고 있다. 위법수집 증거 배제 원칙은 형사소송법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한 증거, 더 나아가 이를 기초로 얻은 2차 증거 역시 원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를 발견해도 증거 수집 절차가 적법하지 않다면 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김학의 사건에 협조했던 참고인 권모씨의 사례로 위법한 증거수집 논란의 실제 적용 사례를 살펴본다.

 ◇수사협조차 제출한 유심, 별건으로 부메랑 

권씨는 내연남이던 건설업자 윤중천씨와 고소전을 치르던 2012년 말 ‘김학의 별장 성접대 동영상’을 처음 세상에 드러낸 인물이다. 권씨는 지난해 5월 검찰에 자신의 휴대폰(유심칩)을 수사 협조 차원에서 임의제출(자진제출)했다.

이 때는 2013년 김학의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 외압을 넣었다는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검찰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곽상도 미래통합당 의원 등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을 시점이다. 동영상 유출 경위를 짚어야 했던 검찰은 수사관을 권씨 거주지 인근으로 보내 권씨가 사건 발생 무렵 쓰던 휴대폰 유심칩을 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6월 초 곽 의원 등을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처분하며, 반대로 참고인이던 권씨를 돌연 공동공갈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권씨가 검찰에 넘긴 휴대전화에서 다른 범죄의 증거가 발견됐다는 게 그 이유였다. 권씨가 한 남성과 공모해 한 의사의 불륜을 폭로하겠다고 겁주며 돈을 뜯어낸 정황이 유심침에서 발견된 것이다.

권씨 측은 “애초 검찰이 ‘수사 외압’을 수사할 목적이라기에 믿고 임의제출 동의서에 서명하며 증거를 냈다”며 “수사에 협조한 참고인을 역으로 재판에 넘기는 것은 전형적인 별건 수사”라고 성토했다. 권씨 변호인은 “수사 과정에서 검찰은 권씨 소환이 필요할 때마다 문제의 내용을 거론하며 수사 협조를 압박했다”는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권씨 기소에 관여한 수사팀 관계자는 “본인 스스로 제출한 휴대전화에서 확인되는 명백한 범죄 행위를 그냥 덮는다면, 검찰이 직무유기를 했다고 비판 받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진 제출 증거라도 다른 곳에 쓰려면 별도로 압수수색영장을 받았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 수사팀 관계자는 “임의 제출된 증거는 영장을 발부 받을 필요도 없다”고 밝혔다. 수사팀이 이렇게 판단한 근거 조항은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소유자, 소지자 또는 보관자가 임의 제출한 물건을 영장 없이 압수할 수 있다’고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18조다. 그는 “본인이 걸릴 게 있으면 처음부터 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법원 “자진제출 증거 범위 넘어서면 영장 받아야” 

하지만 증거를 제출 목적 이외에 활용한 이 사건을 두고서 검찰 내에서도 문제 소지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한 공판부 검사는 “검찰이 수사에 협조한 참고인의 뒤통수를 친 셈인데, 위법한 증거수집 논란이 될 사안”이라 했다. 또 따른 공판검사도 “임의제출 자료를 엉뚱한 데 쓴다면 위법수집 증거로 법원이 배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도 “아무리 자진제출 형식이라도 온갖 민감한 개인정보가 다 실린 휴대폰을 통째로 받아 그 제출자를 처벌하려 드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며 “영장주의(강제처분은 법원 영장에 근거해야 한다는 원칙)를 위반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2007년 위법수집 증거 배제 원칙이 형사소송법에 명문화된 후 법원은 임의 제출 범위를 넘어서는 디지털 증거물을 수사 기관이 다시 임의제출 형식으로 사실상 강제 압수하면 영장주의) 위반이라고 판단해 왔다. 2017년 7월 권석창 전 자유한국당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그 예다.

당시 법원은 “권 전 의원의 공범 김모씨가 수사기관에 휴대전화를 임의 제출할 당시 여러 혐의 중 기부 행위 조사만 진행됐기에 제출 범위도 기부 행위에 한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입당원서 모집 등 다른 공소사실 부분에 대한 휴대폰 속 증거 범위까지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김씨가 제한한 범위를 넘어서는 증거를 수집하려면 별도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았어야 했다”며 “이렇게 수집된 증거는 영장주의 원칙을 위배한다”고 지적했다. 휴대전화에서 나온 음성파일 등 2차 증거 역시 독수독과(毒樹毒果) 원칙에 따라 증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스마트폰 보급에 따라 휴대폰에 사실상 한 개인의 모든 정보가 누적되면서, 이 같은 위법수집 증거 논란은 더 커지고 있다. 전자정보의 경우 자진 제출의 범위가 명시적으로 한정되지 않으면, 수사기관 의도에 따라 사실상 특정 개인의 모든 개인정보가 수사에 활용될 수 있다는 얘기다.

1심이 한창 진행 중인 참고인 권씨 재판에서도 임의제출 동의 범위와 동의서 기재 내용 등을 두고 권씨 측과 검찰 간 공방이 오가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건은 김 전 차관 관련 재판으로서의 의미와 별도로, 자진 제출된 휴대폰의 활용 범위를 어디로 볼 것인가를 규정할 판례 형성에 중요한 사례가 될 전망이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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