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철 칼럼] 홍남기의 ‘재정 항명’이 남긴 숙제

입력
2020.05.04 18:00
수정
2020.05.04 18:0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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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청 100% 재난지원금 지급론에 굴복

재정 우려가 ‘관료 적폐’로 몰린 상황

재정 포퓰리즘 막을 새 준칙 마련돼야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2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범위와 관련해 “70% 지급이 옳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2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범위와 관련해 “70% 지급이 옳다”는 입장을 재확인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재신임 했다’는 표현이 나돈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나눠주자는 청와대와 민주당의 요구를 대놓고 비판하고 반대한 홍 부총리가 경질되지 않은 걸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표현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임명권자가 공직자를 재신임 한다는 건 당사자의 반성과 각오를 전제로 다시 직무를 맡겨 과오나 불신을 만회할 기회를 준다는 뜻에 가깝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홍 부총리는 애초부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혔다. ‘정권의 예스맨’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였던 그가 투사처럼 나선 건 내심 기본소득 방식의 무차별 지급을 꺼렸다는 문 대통령을 의식한 것이라는 뒷얘기도 있지만, 어쨌든 ‘목을 치려면 쳐라’는 식으로 나섰던 셈이다. 문 대통령도 질책보다는 “기재부의 재정건전성 우려도 일리가 없지 않다”는 정도로 다독이는 모양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홍 부총리가 대통령을 재신임 한 것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돌았다.

이런 경과로 볼 때, 홍 부총리의 ‘재정 항명(抗命)’은 어정쩡하게 미봉됐다고 보는 게 맞다. 정권으로서는 어쨌든 전 국민 지급이 관철됐으니 좋고, 홍 부총리는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면서도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돼서 좋고, 국민은 돈 빨리 받게 돼서 좋으니, 일단 시비도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충 넘길 일이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이번 일은 경제부총리까지 직(職)을 걸고 사수하려 했던 재정 방벽이 정치적 압력에 의해 완전히 무력화된 상징적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기재부는 ‘관료 적폐’로 몰리기까지 했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정규 예산 편성 때도 당정협의에서부터 기재부 목소리는 위축되고, 정치권의 편의적 예산 증액 요구에 번번이 휘둘릴 가능성이 커졌다.

안 그래도 코로나19 경제 충격은 앞으로 더욱 심각해져 재정 씀씀이도 팽창될 수밖에 없다. 당장 새로운 정책 과제로 급부상한 전 국민 고용보험만 해도 사각지대 근로자 1,000만명에 대해 막대한 예산이 추가 투입돼야 한다. 여기에 일각에선 차기 대선을 겨냥해 기본소득제까지 거론되고 있어 차제에 재정에 관한 새로운 준칙이 정립돼야 할 필요가 크다.

이번 사태에서 핵심 쟁점은 우리 재정의 건전성 여부였다. 현재 우리나라 국가채무 비율은 국내총생산(GDP)의 40%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10%)보다 크게 낮다.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정면 비판했던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까지도 “한국은 재정이 엄청 건전한 나라”라며 적극적 재정정책을 지지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건 기재부 역시 당장의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항명에 나선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재부가 걱정한 건 국가채무 비율의 상승 속도와 추세다. 기재부는 이미 40% 마지노선을 포기하고, 지난해 발표한 ‘2019~2023년 중기재정운용계획’에서는 2023년까지 관리재정수지 적자 3%, 국가채무 비율 45%로 관리한다는 다소 ‘넉넉한’ 목표를 설정했다. 하지만 올해 코로나에 따른 1ㆍ2차 추경에 최대 30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3차 추경까지 거론되면서 이미 지난해 재정계획은 무너지게 됐다. 이 추세면 국가채무 비율이 2022년에 50%까지 이를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되고 있는 것이다.

성장이 미진한 가운데 재정이 악화하면 세금을 더 걷을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 재정의 GDP 대비 수지규모 비중은 33% 내외로 OECD 평균 43% 내외보다 훨씬 적다. 아직 거론은 않고 있지만 ‘더 큰 정부’를 지향하는 정권으로서는 자산세에서부터 시작해 부가가치세에 이르는 증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정권은 관련 계획을 분명히 알려 국민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 21대 국회가 재정 악화에 대비한 새로운 재정준칙을 본격 논의하고, 재정건전성을 유지할 장기 청사진을 도출해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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