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줄리아 마일스

입력
2020.05.04 04:59
줄리아 마일스는 여성이 쓴 여성의 서사로, 여성이 연기하고 연출하고 제작한 '좋은 작품'만 무대에 올리기 위해 1978년 여성 연극 프로젝트 'Women's Project Theater'를 시작해서 2002년 은퇴할 때까지 이끈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인이다. 맨해튼에 전용극장을 갖춘 그의 극단 'WPT'는 근년까지 600여 편의 작품을 공연하고 분야별 신진 양성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수많은 여성 연극인에게 기회와 희망을 전했다. wptheater.org

2002년 미국 뉴욕주 의회 ‘연극업계 성차별 실태 보고서’는 콜럼비아대 첫 여성 종신교수인 페미니스트 영문학자 캐롤린 하일브룬(Carolyn Heilbrun, 1926~2003)의 한 문장을 얹고 시작한다. “어떤 이야기를 말하게 할지 결정하는 권한이 곧 권력이다.(Power consists to a large extent in deciding what stories will be told)”-‘여성 삶의 기록(Writing a Woman’s Life), 1988’

보고서 요지는, 1969~75년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 극장에 고용된 여성 극작가 및 연출가가 전체의 7%였다가 2000~01년 20%와 23%로 꾸준히 늘었지만, 2001~02년 17%와 16%로 다시 줄었다는 거였다. 보고서가 하일브룬을 인용한 건, 후배 극작가 제니 린 베이더(Jenny Lyn Bader)가 설명하듯, 여성 서사와 여성적 관점의 억압이야말로 젠더 권력이 부푸는 유효한 수단이란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서였다.

연극인 줄리아 마일스(Julia Miles, 1930.1.24~2020.3.18)의 삶이 저 숫자들의 추이의 처음과 끝에 있었다. 1960년대 연극을 시작한 마일스는 무대의 젠더 차별에 진저리 치며 여성 서사를 여성이 쓰고 연출하고 제작해 무대에 올리겠다며 1978년 당시 자신이 소속된 극단 ‘아메리칸 플레이스 시어터(APT)’ 지하실을 빌려 ‘여성 프로젝트 극단(WPT)’을 열었다. 4년 뒤 미국 ‘여성직업연극인연맹(LPTW)’을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87년 APT에서 독립했다. 2002년 은퇴할 때까지 WPT 예술감독 겸 운영자로 일하며, 여러 걸출한 여성 작가, 연출가, 배우들을 배출한 줄리아 마일스가 별세했다. 향년 90세.

영국‘페미니스트 연극 스터디 그룹’회원들이 1978년 10월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가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이 배포한 유인물에는 짧은 질문 9개만 달랑 적혀 있었다. ‘금발은 멍청한가, 아내들은 잔소리꾼인가, 페미니스트는 짜증나는 존재인가, 매춘부는 순하고 착한가(heart of gold), 장모는 참견쟁이인가, 레즈비언은 사나운가, 지적인 여성은 불감증인가, 섹스를 즐기는 여성은 성중독자인가, 노년 여성은 섹스리스인가.’성 편견과 판타지로 범벅인,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남성이 쓰고 만든 서사 예술에 대한 항변이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줄리아 마일스가 ‘여성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그 해였다. 그는 APT 조연출과 예술 조감독으로 만 16년을 일하는 동안 “APT가 무대에 올린 72편 가운데 여성 작가의 작품은 단 8편 뿐이더라”고, “(훗날 구겐하임 펠로십 극작가가 된) 라본 뮬러(Lavonne Mueller, 1945~)는 희곡을 9편이나 발표했지만, 무대에 오른 건 단 한 편도 없었다”고 79년 NYT 인터뷰에서 말했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초대 이사로 참여해 1963년 문을 연 비영리 극단 APT는 실험적인 작품을 주로 공연하며 아프리칸 아메리칸 등 소수계층 작가들에 주목하던 진보적인 오프브로드웨이 극단이었지만, 젠더 문제에 관한 한 실정이 그러했다. 마일스는 포드재단에서 따낸 기금 8만 달러로 극단 지하실을 빌려 ‘여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해 12월 첫 공연 작품은 콜레트, 틸리 올슨, 버지니아 울프, 도로시 파커, 거트루드 스타인, 실비아 플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조앤 디디온 등 한 명 한 명이 희곡의 소재가 될 만한 여성 시인 작가들의 문장들을 발췌해 희곡으로 각색한 일인극 ‘선택들(Choices)’이었다. 당연히 각색(Patricia Bosworth), 연출(Caymichael Patten), 연기(Lily Lodge) 모두 여성이 맡았고, 마일스는 프로듀서(총감독 겸 예산 홍보 책임)였다. 뉴욕타임스는 “(작품은) 버지니아 울프가 ‘안일한 일상(the cotton wool of daily life)’이라 했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여성들의 도전”을 다루고 있다고 소개한 뒤 “(연기 및 연출과 무대에 아쉬운 점이 있지만) ‘여성 프로젝트’에 가담한 이들의 재능을 감안할 때, 우리는 미국 연극계가 기다려온 (새로운) 공연과 희곡, 연출가들에 대한 기대를 품어볼 만하다”고 썼다.(nyt, 78.12.11)

첫 시즌 WPT는, 예산 등 열악한 조건 속에서, 라본 뮬러의 ‘Warriors From a Long Childhood’ 등 3편을 공연하고, 희곡 20편을 리딩 공연했다. 마일스는 “미국 전역의 여성 연극인들을 돕고 싶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받아줄 공간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고, 롤모델도 없다. 지금 브로드웨이 극장을 통틀어 여성이 쓰고 연출한 작품을 공연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broadway.com)

마일스의 비영리 극단 'WPT'는 70년대 이후 탄생한 다양한 여성 극단들과 달리 페미니즘 이슈를 전투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여성이 만든 좋은 연극이란 미학적 원칙까지 고수하며 우회적이지만 근본적으로 여성 서사와 관점을 연극에 반영하고자 했다. 한국계 2세 작가 수전 김(Susan Kim)이 각색한 2007년 연극 ‘조이 럭 클럽’이 공연된 곳도 WPT였다. 사진은 창단 초기의 마일스(오른쯕). wptheater.org

줄리아 마일스는 조지아 주 펠럼(Pelham)의 담배ㆍ목화 농가에서 태어났다. 영화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는데, TV가 점차 보급되면서 마을에 하나 있던 극장이 문을 닫았고, 유년의 그는 영화에서 본 바깥 세상을 동경하며 그 안에 배우가 된 자신을 놓아보는 상상 놀이를 하곤 했다고 한다. 뉴욕서 댄서로 일하다 귀향한 고모가 들려준 도시 이야기도 그를 매료시켰다. 그는 14세에 조지아주 게인즈빌의 여성기숙학교(Brenau Academy)를 거쳐 시카고 인근 노스웨스턴대 연극학과에 진학했고, 배우 지망생이던 대학 동기 윌리엄 마일스(William Miles)와 50년 결혼해 곧장 뉴욕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일스는 잇달아 딸 둘을 낳으면서 전업 주부가 됐고, 남편은 광고회사에 취직해 가족을 부양했다. 50년대 뉴욕서 젊은 백인 여성이 취업을 하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다. 마일스는 아이들을 친정에 보내 놓고 메소드 연기학교로 이름 높던 리 스트라스버그(Lee Strasberg)의 ‘배우학교(Actors Studio)’를 다녔다. 럿거스대 교수 주디스 브로드스키 등이 쓴 ‘예술계 여성 리더들 Junctures in Women’s Leadership: The Arts(2018)’이란 책에 따르면, 마릴린 먼로, 폴 뉴먼, 로버트 드니로, 제인 폰다 등이 마일스의 배우학교 동기였다. 마일스는 TV 아침드라마에 간호사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었지만, “오디션 보러 다니는 게 너무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58년 이혼하고 얼마 뒤 연예 에이전트 샘 콘(Sam Cohn,1929~2009)과 재혼했다. 콘은 70, 80년대 배우 폴 뉴먼과 메릴 스트립, 배우 겸 감독 우디 앨런, 극작가 아서 밀러 등의 매니저로 활약한 거물 에이전트지만, 당시엔 물론 신참이었다. 그 사이 마일스는 브루클린 세인트 앤스(St. Ann’s) 교회 창고를 빌려 ‘시어터 커런트 컴퍼니(Theatre Current Company)’를 창단, 아놀드 와인슈타인의 희곡 ‘Red Eye of Love’ 등을 공연하다가 갓 창단한 APT에 연출 조수로 64년 입단했다. 그는 빠르게 승진하며 3년 여 뒤 예술조감독이 됐고, 이후 내도록 승진 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리곤 극단 지하실에서 여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정식 공연이 아니라 배역을 나눠 희곡을 낭독하는 간이 연극을 일컫는 ‘리딩 공연’은 여럿이 희곡을 평가하고, 연구하고, 관객 반응을 살펴 개선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마일스는 지인들과 자기 집 거실에 모여 희곡을 낭독하는 ‘줄리아의 리딩룸(Julia’s Reading Room)’ 모임을 이끌어온 터였다. 그 모임을 통해 여성 연극인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서 소문을 듣고 온 신인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게 사실 WPT의 밑천이었다. 연극ㆍ뮤지컬로 근년의 브로드웨이와 오프브로드웨이를 휘어잡고 있는 게일 크리겔(Gail Kriegel)의 첫 두 작품이 처음 낭독된 곳이 마일스의 거실이었고, 초연한 극단이 WPT였다.

줄리아 마일스 주도로 1982년 출범한 미국 '여성직업연극인 연맹(LPTW)' 창립 멤버들. 연극인 급여 성차별 반대 등과 함께 맨 오른쪽 여성이 든 피켓에는 '50/50 in 2020'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theatrewomen.org

82년 출범한 여성직업연극인연맹(LPTW) 창립 아이디어는 한 해전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미국연극협회 행사에 참가한 여성 연극인들이 냈고, 실질적 산파는 마일스였다. 초대 회장이 된 그는 “브로드웨이 상업 극장들에 비영리 여성 연극인들의 역량을 알리고, 협업과 상생의 기회를 확대하고자 한다”고 취지를 밝혔다. 여성 연극인에게 무대는 ‘자아실현’에 앞서 밥을 벌어야 하는 일터였다.

모극단인 APT와 마일스의 WPT는 처음부터 독립채산제로 운영됐다. 후원금을 포함한 수입과 공간 임대료 등 지출 장부도 따로 썼다. WPT가 호평 속에 성장하면서 관계가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87년 WPT의 ‘에빙던 스퀘어(abingdon square)’공연이 ‘오비상(Obie Award)’을 수상하며 대성황을 거두자 갈등이 절정에 달했다. 마일스의 WPT는 그해 ‘지하실’에서 독립해야 했다. 사실상 쫓겨난 셈이었다. 이후 11년간 WPT는 YWCA 강당 등을 대관해서 공연을 이어갔고, 출범 20년이 되던 1998년 뉴욕 55번가의 199석 극장을 사들임으로써 ‘유랑 극단’ 생활을 청산했다. 희곡작가 겸 자선운동가 샐리 빙엄(Sallie Bingham)이 50만 달러를 기부하고, 나머지 이사진과 뉴욕시의회 등이 50만 달러를 보태고, 포드 재단의 보증으로 은행서 100만 달러를 빚내서 산 건물이었다.

그 해 솔로몬구겐하임기념재단은 희곡 작가 5명에게 주는 상 가운데 3개를 여성 작가인 매리 갤러거(Mary Gallagher)와 에밀리 만(Emily Mann), 웬디 바서슈타인(Wendy Wasserstein)에게 수여했다. 만의 대표작 ‘Still Life’는 WPT의 1980~81 초연작이었고, 바서슈타인은 WPT 이사였다. 여성 연출가로선 최초로 ‘뷰티 퀸(The Beauty Queen of Leenane)’의 게리 하인스(Garry Hynes)가 연극 연출부문 토니상을 타고, ‘라이온 킹’의 줄리 테이머(Julie Yaymor)가 뮤지컬 3관왕에 오른 것도 1998년 그 해였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줄리아 마일스가 “여성 프로젝트를 시작한 78년 우리에게 접수된 여성 희곡 작품은 연간 100편 가량이었는데, 지금은 약 500편씩 들어온다”고 말했다. WPT는 출범 이래 여성 작 600여 편을 공연했고, 중남미, 아시아 여성 작가와 감독, 배우 발굴에도 공을 들였다.

경비 조달 등 극단 운영은, 물론 이사진이 있었지만, 주로 마일스 몫이었다. 80년대 미국 사회의 보수화와 페미니즘 백래시 속에 포드나 록펠러 멜론 등 재단 후원이 줄었고, 국립예술지원기금(The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도 해마다 인색해졌다. 관객들도 비영리 실험극단의 공연보다는 말랑말랑한 오락물(feel-good melodramas)을 선호했다. 오프브로드웨이 극단만 300개가 넘던 시절이었다. 브로드스키의 책

은 마일스의 성공 비결 중 하나로 WPT가 연극 미학을 페미니즘 이념에 종속시키지 않았다는 점(avoid pigeon-holing)을 꼽았다. 여성실험극단(WET), 뉴페미니스트극단(NFT) 등 다수의 후발 여성 전문 극단들이 레즈비언, 노동여성, 가정폭력 피해 여성 등 젠더 이슈를 전투적으로 극화하는 동안. WPT는‘여성이 쓴 여성들의 좋은 연극’이라는 출범 초기의 원칙을 고수했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이념과 자의식의 과잉은 예술(가)에 족쇄가 된다. 경계를 넘어서면 예술이 아니라 운동이 된다. 그런 선택은 장기적으로 연극(예술)에도 여성(페미니즘)의 자긍심을 돋우는 데도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연극인 교육 프로그램과 네트워킹이었다. 희곡 리딩모임으로 시작된 WPT 프로그램은 83년 ‘연출 포럼’ 92년 ‘작가 랩(Lab)’ 2006년 ‘프로듀서 랩’ 등으로 확장돼 신-구 세대간 협력-수혈 시스템을 구축했다. 랩 출신 작가-연출가-프로듀서 각 한 명씩 3인 1조로 꾸린 팀들이 협업 작품을 공연하는 ‘파이프라인 페스티벌(Pipeline Festival)’도 2016년부터 2년마다 열었다. 그건 신인 연극인들의 데뷔무대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마일스의 리더십과 포용력, “신념에 기반한 강력한 호소력”이었다. WPT 원년 멤버로 오래 포럼 감독을 맡았던 수전 베넷(Suzanne Bennett)은 “마일스와 함께 일해보면 누구나, 자신이 역사적이라 할 만큼 대단히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고 말했고, 마일스의 딸인 극작가 마리아 콘(Marya Cohn)은 “엄마는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tough-cookie) 분이었지만, 함께하는 이들과 말 그대로 ‘함께’ 일할 줄 아는 분이었다”고 했다.

그와 극단은 소속 연극인들의 영광과 별개로 수많은 찬사와 상을 받았다. 그는 “나의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는 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도록 무대와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희곡 등을 모은 11권의 WPT 앤솔러지를 출간한 뒤 2002년 은퇴했다. 2년 뒤 극단 이사회는 WPT 극장 이름을 ‘줄리아 마일스 시어터’로 개명했다.

마일스의 은퇴와 함께 WPT 원년 이사회 멤버들도 대폭 물갈이됐다. “줄리아는 단 한번도 허용한 적 없는 남성들이 이사진에 포진했고(…)”“연극보다는 후원금 기여도(fund raising)가 높은 이들의 발언권이 커졌다.”원년 멤버이자 최대 후원자 중 한 명인 작가 샐리 빙엄은 이사 사퇴의사를 밝히는 글-Goodbye to the Women’s Project-을 자기 홈페이지에 게재하며 “내가 이 텅 빈, 공허한 인터넷 공간에 사퇴 의사를 밝혀야 하는 현실이 무척 낯설다”고 썼다. 그건 마일스의 빈 자리였다. 최윤필 기자

가만한 당신
한국일보 뉴스 네이버 채널 구독하기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