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의 어린이처럼] 진짜 아빠

입력
2020.05.01 04:30

“엄마 집에 갔다 온 날은/아빠한테 맞았다”는 첫 행이 모든 상황을 함축하며 충격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청소년을 독자로 하는 청소년 시에서 이리 처절하게 부모의 이혼과 재혼, 가정폭력을 말한 적이 있던가. 여성 청소년 화자는 가정폭력에서 탈출해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한다. “엄마 집”으로 갔으니 아빠 아닌 엄마를 선택한 것일 텐데도 “친아빠가 아닌/새아빠를 선택했다”며 혈연 가족에 갇힌 채 폭력의 사슬에 발목 잡히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청소년 시에서 대개 청소년의 삶은 누구나 지나 온 사춘기에, 누구나 할 법한 고민들, 누구든 그 시기를 보내고 나면 사라질 일들인 것처럼 그려졌다. 동시가 어린이란 존재를 어른과 구별되는 단일한 특성을 지닌 존재로만 바라볼 때 어린이의 구체적 현실을 세심하게 나타내는데 미흡했듯 청소년 시의 청소년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시처럼 청소년 한 명, 한 명의 목소리가 더 정확하게 들릴 때 목소리들의 합으로 청소년의 삶은 비로소 뚜렷하게 재현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집에는 청소년 시에서 소외되고 흩어졌던 여성 청소년의 목소리들이 빽빽하게 저장되어 있다. 걸음걸이 같은 애티튜드조차 억압하는 요구에 반문하고(‘여자답게 걸어라’), 학생 성별에 따라 종목이 분리되는 체육시간과 치마에만 해당되는 복장 규제를 비판하고(‘양성불평등’), 똑같이 생계노동을 하면서도 엄마 혼자 저녁을 준비하는 가사노동의 불평등에 분노한다(‘시험 전야’). 생리대 살 돈이 없어 며칠 전부터 대체품을 준비하는 여성 청소년(‘그날’)과 성정체성을 알게 된 가족들의 혐오 발언과 위협을 견디는 퀴어 청소년(‘있을 곳이 없다’), 미혼모가 등장한다. 살아 숨 쉬는 목소리들로 청소년의 삶이 살아난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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