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늘보처럼 느긋하게…삶을 직시하고 결코 도망가지 않기

입력
2020.04.18 10:00
수정
2020.05.13 09:42

[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32)] 여행자에게 팬데믹이란 4편

오늘의 교훈. 나무늘보처럼 지금 그 자리에서 천천히 내가 할 일을 하는 거다.
오늘의 교훈. 나무늘보처럼 지금 그 자리에서 천천히 내가 할 일을 하는 거다.

칠레 중남부 비야리카에서 결국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혔다. 일주일 묵기로 한 에어비앤비 숙소의 예약 만료일이 가까워졌다. 1년 전 한국을 출발하며 장기 여행 항공권을 예약한 ‘집월드’로부터 답변이 왔다. 여행사 직원이라기보다 조금은 사적인 메시지였다.

“당신이 예약한 항공권 패키지는 팬데믹 때문에 취소해도 환불 조건이 불리해. 변경은 가능하지만 말이야. 우리도 감당해야 할 수수료가 만만치 않거든.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게 옳은 일 같아.” 일단 갈라파고스와 파리행 항공권을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미뤄뒀다.

2주를 연장할까, 한 달 더 묵을까? 고민이 깊어졌다. 뉴스를 보아하니 선택권은 그다지 없어 보였다. 에어비앤비는 이미 칠레의 숙소 예약을 받지 않고 있는 상태다. 묵고 있는 숙소의 호스트인 마리나와의 직접 협상만 남았다. 그녀는 우릴 계속 받아줄까(쫓겨나면 어쩌지)? 위험을 무릅쓰고 산티아고의 ‘아는 숙소’로 넘어가야 하는 걸까?

“난 행복해. 어떤 운명이 당신들을 이곳으로 오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배울 점이 있지 않을까. 나는 이 고립된 상황에서 친구를 얻은 것에 감사해.”

더 머물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녀의 답변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그녀가 시인이자 날개 없는 천사로 보였다. 선물이든 뇌물이든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비와 맞바꾸자고 했던 바로 그 그림! 태블릿PC를 들고 그녀를 떠올렸다. ‘꽃’이었다. 망설임 없이 선을 긋고 색을 입혔다. 그 순간만은 ‘그림 그리기가 세상에서 가장 쉬웠어요’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절박함과 고마움이 그 만큼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연예인에게 비친다는 그 후광, 난 마리나에게서 자주 보았다. 좋아하는 꽃을 모티브로 반려견 로렌소까지 꽃으로 단장해버렸다.
연예인에게 비친다는 그 후광, 난 마리나에게서 자주 보았다. 좋아하는 꽃을 모티브로 반려견 로렌소까지 꽃으로 단장해버렸다.
한국인 딸을 임시 보호하게 된 칠레인 엄마 마리나와 한 컷. 주책없이 반려견 로렌소가 뒤집기 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한국인 딸을 임시 보호하게 된 칠레인 엄마 마리나와 한 컷. 주책없이 반려견 로렌소가 뒤집기 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새뜻한 아침, 오랜만에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마음은 비장했다. 마스크를 대체할 손수건, 그리고 여권도 챙겼다. 약 1시간 떨어진 도시 테무코(Temuco)에 가는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테무코의 스코티아은행이다. 대부분의 칠레 은행에서 1회 현금 인출 한도는 20만페소(약 28만원), 수수료는 은행 또는 현금자동지급기의 위치에 따라 5,000~7,000페소(약 7,200~1만원)다. 좀 과장하면 배보다 배꼽이 크다. 스코티아은행은 유럽인의 카드로 인출할 경우 수수료가 무료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프랑스인) 탕탕의 카드로 현금을 넉넉히 뽑아 둘 참이었다.

한 달 추가 체류비 때문이기도 했다. 전날 숙박 연장을 앞두고 집주인 마리나와의 팽팽한 신경전을 예상했는데, 말한 바와 같이 흥정은 싱겁게 끝났다. 아니 마음이 뜨거웠다. 그녀는 장사할 체질은 아니었다. 얼마인지 물으니 맘대로 내란다. 언제까지 이런 타지에 칩거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숙박비 결정권은 손님에게 있다고 답했다. 예상한 금액이 있었지만 함부로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에 걸렸다. 우리 처지만 내세우기엔 그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한편으론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우리의 잔고를 조여올 거란 불안도 컸다.

고민 앞엔 역시 돌직구다. 우리가 지불하고 싶은 비용과 (그보다 높은) 합당한 가격, 두 가지를 제시했다. 그녀의 선택은 전자였다. 해외에서 극적으로 고맙거나 화가 날 땐 한국어나 한국인의 습관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90도로 깍듯이 인사했다. 이 고마움을 말로 오롯이 표현할 수 있도록 스페인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때다. 위기가 곧 기회였다.

테무코로 가는 승용차의 탑승자는 모두 셋이다. 탕탕이 운전대를 잡고 마리나가 뒷좌석에 동승했다. 그녀는 현지 뉴스를 통해 외국인 여행자에 대한 갖가지 부당한 처사를 파악하고 있었다. 경찰이 외국인을 발견하면 바이러스 검사를 하기 위해 바로 병원으로 후송하거나, 연방경찰에 넘기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마리나는 어떤 대가도 없이 우리의 보디가드로 나선 거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든든했다. 종잡을 수 없던 긴장이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었다.

테무코로 들어서면서 ‘사람 구경’을 했다. 저마다 마스크를 착용하거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경찰도 자주 눈에 띄었다. 날씨는 마음 따라 짓궂어졌다. 예상과 달리 스코티아은행의 대기 줄은 짧았다. 은행원과 대면 업무를 보려면 줄을 서야 한다. 출입 인원을 통제하고 있는 경비원에게 현금자동지급기를 사용한다고 했더니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은행에 들어서니 소독약 냄새로 코가 시큰거렸다. 그간 탕탕과 마리나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았고, 임무를 완수한 난 바로 탑승했다.

일이 끝나자 마리나는 당장 숙소가 위치한 비야리카로의 돌아갈 것을 명했다. 테무코에 사는 친구에게 그날 오후 7시부터 외부 출입을 막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모양이다. 사실 테무코는 아라카우니아주(州) 감염자의 70%가 몰려있는(3월 26일 기준) 주도다. 브라질 여행에서 돌아온 지역보건국의 한 청년이 코로나19에 감염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안이 더욱 커진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 마리나는 어쩌자고 우릴 따라나선 걸까. 나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노인 공경의 나라, 칠레. 70세 이상의 노년층은 열 체크와 손 소독 후 먼저 입장이 가능했다. 번호표를 받고 사람끼리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노인 공경의 나라, 칠레. 70세 이상의 노년층은 열 체크와 손 소독 후 먼저 입장이 가능했다. 번호표를 받고 사람끼리 거리를 두고 서 있다.
Les francais au Chili 페이스북. 9,600여명 가입자의 빠른 문답과 경험담이 올라오고 있다. ‘혼자가 아니야’란 위안처이기도.
Les francais au Chili 페이스북. 9,600여명 가입자의 빠른 문답과 경험담이 올라오고 있다. ‘혼자가 아니야’란 위안처이기도.

칠레의 코로나 처방책 역시 ‘금지’ 혹은 ‘제한’이다. 보건 당국은 초기에 수도 산티아고의 7개 구에만 강제 자가격리 명령을 내렸지만, 외출 금지 지역이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해당 지역에서 생필품을 구입하거나 공항으로 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이동해야 한다면 임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자가격리가 시행되지 않는 비야리카의 실내 시설 역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출입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생활잡화점인 소디막은 입장객의 발열 여부를 체크하고 손 소독을 의무화했다.

여행자 입장에서 현지 사정은 변칙이 난무했다. ‘카더라’ 통신을 통해서다. 우리가 믿을만한 소식통은 두 개의 페이스북 페이지(Les francais au Chili와 Français au Chili) 뿐이다. 칠레에 살거나 여행하다가 발이 묶인 프랑스인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통로다. 숙박 가능한 공간을 수시로 소개해 희망을 주고, 자신이 겪은 쓰린 체험담을 올려 위기에 대처할 정보를 제공한다. 바닥나 가는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며 머물 곳이 있는지 자문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며칠 전 코이헤이크(Coyhaique)의 한 호스텔에 묵고 있던 여행자는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서 전부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로나와 관련해 어떤 제한 조치도 없었던 도시다. 우리가 푸콘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중앙 정부의 방침 외에 지방자치단체의 임의 제한 조치가 속출하는 실정이다. 당국의 엄중한 대처에 수긍하고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쪽이 아렸다.

자, 오늘의 할 일을 시작해볼까. 아직 가을이지만, 볕이 잘 들지 않는 우리의 작업실에선 매일 불을 지핀다. 활활.
자, 오늘의 할 일을 시작해볼까. 아직 가을이지만, 볕이 잘 들지 않는 우리의 작업실에선 매일 불을 지핀다. 활활.
마리나로부터 칠레의 문화를 배우고 있다. 아라우카리아 주의 토종 잣이다. 한국의 잣보다 길고 밤처럼 단맛을 지녔다.
마리나로부터 칠레의 문화를 배우고 있다. 아라우카리아 주의 토종 잣이다. 한국의 잣보다 길고 밤처럼 단맛을 지녔다.
우려와 달리 칠레엔 ‘사재기’는 없다. 그런데 우린 왜 와인을 사재기를 하고 있는가.
우려와 달리 칠레엔 ‘사재기’는 없다. 그런데 우린 왜 와인을 사재기를 하고 있는가.
나무늘보의 인생 지혜를 알려주는 책. 그는 지금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
나무늘보의 인생 지혜를 알려주는 책. 그는 지금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고 감정에 함몰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울 때 오는 막연한 공포, 혹은 그와 엇비슷한 부정적인 감정을 흘려보내려고 한다. 지금 내게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바꿀 힘은 없다. 그러나 나의 상황은 통제할 수 있다.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 챙김이 필요한 때임을 새초롬한 풀잎이 가르쳐줬다. 엄마에게 매일 안심용 전화를 걸고, 친구의 안부도 종종 물으며,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또 다른 내일을 응원한다.

호주에서 친구에게 선물하려고 구입한 책을 꺼내 들었다. 명문장이 수두룩했다. 제목은 ‘나무늘보처럼 돼라(Be a Sloth)’다. 부제는 ‘그리고 의심이 들 땐 그냥 느긋하게 보내’다.

“Sloth isn’t afraid of anything or anybody… He faces life head-on and would never run away… even if he could.

나무늘보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을 직시하고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있을지라도.”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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