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비극이 소극(笑劇)으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입력
2020.04.10 04:30
25면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고영권 기자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이른바 ‘엔(N)번방 사건’은 여성 특히 아동과 청소년, 여성을 대상으로 성착취를 하고 불법촬영을 하여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방의 다수 회원에게 판매해 엄청난 수익을 취득한 사건이다. 취약 대상을 상대로 한 범죄의 잔혹성과 패륜성도 문제지만, 수만 명의 남성이 대화방에 가입하여 범죄를 교사ㆍ방조하였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경악하고 있다. 사람들의 공분은 가해자들에 대한 신상공개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라는 청원과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원합니다”라는 청원이 각각 200만명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현행 신상공개제도는, 법원의 확정판결에 따라 재범 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일종의 보안처분의 성격을 갖는 신상공개(‘성폭력처벌법’ 제42조, ‘청소년성보호법’ 제49조)와 수사 중 피의자에 대한 것으로 국민의 알 권리 내지 수사를 위한 신상공개(‘특정강력범죄법’ 제8조의2, ‘성폭력처벌법’ 제25조 등)로 나눌 수 있다. 문제되고 있는 것은 피의자에 대한 신상공개이고, 이번 사건에서는 처음으로 ‘성폭력처벌법’ 제25조가 적용되었다.

‘성폭력처벌법’ 상의 피의자 신상공개는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고 필요할 때 국민의 알 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 방지 및 범죄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이 경우에도 피의자의 인권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고 이를 남용해서는 안되며, 만약 피의자가 ‘청소년 보호법’ 상의 청소년인 경우에는 공개할 수 없다. 범죄자의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및 실제거주지, 직업 및 직장 등의 소재지, 연락처, 신체정보, 소유차량의 등록번호가 공개되는 보안처분적 신상공개와 달리, 피의자 신상공개의 범위는 얼굴, 성명 및 나이 등 피의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에 국한되는데, 이때 수사기관은 얼굴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아니라, 얼굴을 가리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소극적인 방식만을 취할 수 있다.

피의자 신상공개제도는 헌법상의 무죄추정 원칙에 반하고 이중 처벌과 인격권 침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공의 이익’ 개념은 기본권 제한에 있어서 불명확하기도 하다. 공공의 이익은 피의자의 재범 방지, 범죄 예방과, 부수적으로는 피의자의 여죄(餘罪) 파악을 내용으로 하지만, 이미 신병이 확보된 피의자가 동종의 재범을 할 가능성은 없으며, 범죄 예방의 효과는 검증된 바는 없다. 잔혹한 범죄자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호기심이 일지만, 이것이 국민의 알 ‘권리’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다. 실상 국민의 알 권리는 언론의 상업주의 내지 피의자에 대한 망신주기와 다름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지점이다. 신상이 공개된 피의자는 방어권이 위축되고 공정한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되며, 피의자 가족에게 그 효과가 미친다는 점에서 연좌제와 같다는 비판도 따른다. 게다가 지금의 신상공개는 범행 동기나 심정을 일방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의자에게만 과도한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는 측면이 있다. 실무상, ‘신상공개위원회’의 판단이 자의적이라는 여론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피의자 신상공개는 신상 정보가 노출되어 일상을 영위하기 힘든 피해자에 반해 피의자도 상응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점, 피해자의 권리보다 가해자의 권리가 더 보호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회의, 그리고 사회의 관대한 태도와 법의 미온적 처벌에 대한 보완적 조치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더 나아가 이번 사건에서처럼 다수의 가해자가 누구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데 따른 일반의 불안과 또다시 성범죄에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는 피해자들의 공포를 해소함으로써 시민의 안전과 피해자 일상의 회복에 대한 요청도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이번 사건은, 소라넷 사건을 비롯해 일련의 디지털 성범죄에 관대했던 문화와 법의 태도에 내재된 것이어서 안타깝다. 통상의 강력 범죄에 비해 디지털 성범죄의 기소율과 구속율은 현저히 낮다. 설사 기소되더라도 법원에 의해 집행유예나 선고유예를 받는 비율이 높은 편이고, 그나마 대부분은 벌금형으로 처벌된다. 더 나아가 (디지털) 성범죄의 원인을 피해자로부터 찾거나 피해자의 기여로 보는 일부 비뚤어진 시각에 분노한다. 누구도 범죄를 당해도 되거나 범죄를 저지를 권리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원인과 책임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책임을 희석시키고, 또 다른 피해를 낳는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다.

이제 겨우 일부 운영자를 체포하여 수사 중에 있고, 여전히 검거되지 않은 운영자들과 가담자들에 대한 적발과 체포 그리고 수사와 재판, 처벌이 남아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범죄자를 반드시 적발하고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헤겔은 어느 부분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소극(笑劇ㆍfarce)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김대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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