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佛 언론계의 포레스트 검프, 20세기 역사에 개입하고 기록하다

입력
2020.04.06 04:03

 장 다니엘 

프랑스 중도 좌파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공동 설립자겸 기자 장 다니엘은 20세기 주요 국제 외교 무대와 전쟁-분쟁의 '현장'을 누비며 관찰-기록자의 직분을 넘어 외교-정치적 결정 과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막후 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그 역할은 지식인 앙가주망 전통에서 비롯된 프랑스 저널리즘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는 좌파였지만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았고, 유대인이었지만 시오니즘에 반대했고,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 해방전쟁의 명분과 당위를 옹호했다. 그는 휴머니스트였다. Getty Images.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대모로 대접 받는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은 “내 조국은 미국이지만 내 고향은 파리”라고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착한 미국인은 죽어서 파리에 간다”고 했고, 20대 중반 5년여를 파리에서 보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옛날을 회고하며 64년 자서전 제목을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eable Feast)’라 달았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헤밍웨이, 피카소, 스콧 피츠제럴드 등 전설적 예술가들의 낭만적 삽화들을 퀼트처럼 펼쳐 놓은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도 1920년대 파리의 어느 밤이었다. 후세대 예술가들은 파리의 20, 30년대를 ‘광기의 나날들 Les Années Folles’이었다며 은근히 질투했다.

하지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그 무렵(1914~1945)을, 20세기 ‘극단의 시대’의 씨앗들이 뿌려진 ‘파국의 시대’라 명명했다. 중동 비극의 거대한 씨앗인 ‘벨푸어 선언(1917)’이 있었고, 우드로 윌슨의 고립주의적 ‘민족자결주의(1918)’ 선언이 있었다. 20세기의 숱한 비극을 연출한 이데올로기들(사회주의, 공산주의, 보수주의, 파시즘 등)이 전후 민족주의와 난폭하게 결합하며 그리스-터키 전쟁과 핀란드 및 동유럽 내전과 혁명, 테러와 보복 테러를 낳았고, 아프리카와 남미 아시아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적 탐욕의 마지막 발악에 맞서 가장 대표적으로는 알제리 독립전쟁을 촉발시켰다. 1차대전 전후의 참상을 분석한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 현대사학자 로버트 거워스는 홉스봄이 본 파국의 씨앗들이 아직 생생히 살아있다고, ‘왜 제1차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김영사)라는 책에 썼다.

헤밍웨이가 ‘시대는 요구했다’라는 시를 쓴 것도 사실 1922년 파리에서였다. “시대는 우리에게 노래하라고 요구하고는/ 우리의 혀를 잘라 버렸다/(…) 시대는 우리에게 춤추라고 요구하고는/ 우리를 강철 바지에 욱여 넣었다”(‘거물들의 춤’ 민음사) 만년의 그가 아름답게 추억한 ‘광기의 나날’ 너머에서는 그렇듯 민족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의 진짜배기 광기가 역병처럼 번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도 좌파 매체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 줄여서 누벨 옵스)’의 창업자 장 다니엘(Jean Daniel)이 태어난 해가 1920년이었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저 시대의 자장 안에서 성장해, 철학을 전공했고, 소설을 썼고, 기자로서 저 파국의 포기들 즉 독립전쟁과 냉전, 민족ㆍ영토 분쟁들에, 가히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행운과 열정으로 개입하고, 또 기록했다. 그는 ‘좌파의 토템’같은 존재였지만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았고, 프랑스 시민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을 옹호했고, 유대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적 팽창주의를 비난하며 아랍과 팔레스타인 주민들 곁을 지켰다. 그가 2월 17일 별세했다. 항년 99세.

존 F. 케네디가 암살 당한 1963년 11월 22일, 다니엘은 쿠바 권력자 피델 카스트로와 나흘째 대담 중이었다. 그는 워터게이트사건 당시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이던 친구 밴 브래들리(1921~2014)의 천거로 10월 25일 백악관에서 케네디를 인터뷰하며 케네디에게서 카스트로에게 비밀 제안을 전해달라는 청을 받고, 11월 19일 쿠바를 방문한 터였다. 핵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였다. 케네디의 제안은, 다니엘에 따르면, 미국이 공산국가 유고슬라비아(당시)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온 것처럼 “쿠바도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국가가 돼 라틴아메리카를 무력으로 장악하려 들지만 않는다면, 공산주의를 택하든 민족주의를 택하든 모두 용인하겠다”는 거였다. 다니엘은 카스트로가 “매우 열정적으로 몰두하며 내 말에, 케네디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고 전했다. 카스트로는 미국의 중남미 외교노선과 CIA의 여러 반혁명 시도들을 비난하는 한편 “케네디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이해한다면(…) 링컨을 능가하는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1)이란 말을 했다고, 63년 뉴리퍼블릭 기사에 썼다.

아바나 외곽 바라데로 해변의 카스트로 별장에서 둘이 대담을 이어가던 중 당시 쿠바 대통령 도르티코스(Dorticos)의 긴급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Como? Un atentado?(뭐라고? 암살 기도?)” “Herido? Muy gravemante?(다쳐? 심각하다고?)” 전화를 끊은 직후 카스트로는 다니엘에게 “Es una mala noticia(아주 나쁜 소식”)이란 말을 세 차례 반복한 뒤 케네디 피격 사실을 전했고, 둘은 침울한 표정으로 마이애미 뉴스 등 미국 방송을 시청했다. 카스트로는 다니엘에게 “이제 모든 게 달라졌고, 달라질 것이다.(…) 냉전도, 러시아와의 관계도, 라틴아메리카와 쿠바와의 관계도, 심지어 흑인 문제까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이건 매우, 매우 심각한 문제다”라며 “미국은 시급히 범인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두고 봐라, 그들은 곧장 우리를 의심하고 비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newrepublic.com)

사건 자체와 별개로, 그 역사적 비극은 기자 장 다니엘을 세계적인 명사로 만들었고, 프랑스 언론ㆍ지식인 사회의 전통인 앙가주망(engagement, 개입ㆍ참여)의 상징적 사건으로 부각됐다. 그는 이듬해 누벨 옵스를 창간했다.

누벨 옵스를 창간한 직후의 장 다니엘. 그는 저널리즘의 중립-불편부당의 가치보다 진보적-좌파적-휴머니즘적 가치를 적극 옹호하는 수단으로서 언론을 활용했고, 스스로도 언론인이기 이전에 세계주의적 외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Getty Images

장 다니엘은 알제리 수도 알제 남쪽 빌다(Bilda)의 부유한 유대인 제분업자 집안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1920년 7월 21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역 유대인 종교공동체의 리더였지만, 그는 유년시절부터 신앙생활에는 별 뜻이 없었다고 한다. 지역 대학(Bilda College)에 다닐 무렵부터 그는 프랑스 좌파정당(Popular Front) 기관지를 탐독했고, 특히 앙드레 지드 등의 문학에 심취했다. 알제리 대학으로 옮겨 철학을 전공했고, 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직후 레지스탕스 자유프랑스군(FFF)에 입대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웠고, 노르망디 상륙전에도 참전했다. 전후 프랑스 사회당의 펠릭스 구앵(Felix Gouin, 1884~1977) 임시정부에 가담해 정치인 연설문을 써주는 등 약 8개월간 일한 뒤 정치를 접고, 소르본느에 다시 입학해 철학을 전공했다. 47년 좌파 문예잡지 ‘칼리반(Caliban)’을 창간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및 작가들을 비롯한 당대 유럽 지식인들과 폭넓게 교유했다. 알제리 출신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칼리반’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 겸 후원자였고, 다니엘의 멘토였다. 그는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카뮈가 내게 미친 영향은 가히 전면적이었다.(…) 지난 50년간 내 생각과 내 글의 모든 주제들은 카뮈와 나눈 대화나 그의 책에 언급된 것들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elpais.com) 경영난으로 52년 ‘칼리반’을 폐간한 뒤 그는 알제리 오랑(Oran)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첫 소설 ‘L’Erreur, 실수’를 썼고, 당시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장이던 카뮈가 해제를 써서 그 책을 출간했다. 다니엘은 54년 좌파 시사 주간지 ‘렉스프레스(L’Express)’ 기자가 됐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이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한 게 그 해 11월이었고, 그는 56년부터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프랑스군의 FLN 포로 학대 등 잔학상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해 두 차례나 반국가사범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1960년 알제리 독립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비판한 ‘121 선언’의 121인 주역들- 모리스 블랑쇼, 사르트르, 보부아르, 기 드보르 등-과 세계 진보 좌파 지식인들의 도드라진 대변자로 명성을 높였다.

그는 61년 튀니지 국경 비제르테(Bizerte)의 프랑스군 기지 인근 전투 취재 도중 총상을 입고, 9차례 수술 끝에 회복됐다. 그는 62년 3월의 종전과 알제리 독립을 병상에서 지켜봤다.

1830년 알제리를 식민 통치한 프랑스는 1870년 보불전쟁 직후 알자스 로렌 지역을 독일에 할양하면서 그 지역 농민들을 알제리로 이주시켜 농지와 주택을 제공하는 등 알제리의 본토화에 박차를 가했다. 카뮈가 그 직계 후손이었다. 그들 유럽 출신 알제리인 ‘피에 누아르(Pied-Noir)’는 1870년 ‘크레미유 칙령(Cremieux Decree)’에 따라 프랑스 국적을 인정받았다. 알제리 유럽인들이 레지스탕스에 적극 가담한 데는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이 다수가 유대인이던 피에 누아르를 겨냥해 그 칙령의 폐지를 선포한 탓도 있었다. 카뮈를 포함한 그들 대부분은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을 무척 중시했다. 같은 피에 누아르지만 15세기 스페인계 이민자 혈통인 다니엘은 카뮈와 조금 달랐다. 그는 자기 정체성의 근간으로 “첫쌔는 지중해인이고, 그 다음이 프랑스인이고, 마지막이 유대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알제리 독립의 명분과 당위를 지중해-코스모폴리탄 좌파 휴머니스트로서 편들었다.그 차이가 앙금으로 남아 다니엘과 카뮈는 59년 결별했다.

다니엘이 48년 1차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시나이반도를 점령한 일과 67년 이스라엘의 기습전으로 시작된 ‘10일전쟁(제3차 중동전쟁)’ 등을 두고 이스라엘을 맹비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는 긍정하고 초대 대통령 벤구리온과도 친구처럼 지냈지만, 그건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양국주의) 및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를 전제한 거였다. 그는 2013년 펴낸 ‘유대의 감옥에서(La Prison juive)’란 책에서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이데올로기의 감옥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 속에 가두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선민의식의 감옥과 홀로코스트 추모의 감옥이 그것이라며 “감옥에 갇힌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박해하면서도 스스로를 희생자로만 여기며, 자유의 정신을 감금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썼다.(lrb.co.uk)

장 다니엘은 쿠바 미사일위기 직후인 1963년 J.F.케네디의 비밀 메시지를 갖고 쿠바 권력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 일로 유명해졌다. 그는 카스트로와 대담 중 케네디의 암살 소식을 들었다. 사진은 1960년 5월 혁명 희생자 추모 행진 중인 쿠바 아바나의 혁명 주역들. 맨 왼쪽이 피델 카스트로. wikipedia.org

누벨 옵스는 다니엘 등이 급진 좌파 통일사회당(PSU)의 대변지였던 ‘옵세르바퇴르’를 인수해 ‘반공산주의 좌파(제2의 좌파)’를 표방하며 출범했다. 다니엘 편집장 체제의 누벨 옵스는 화려한 필진과 거침없는 당파성으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엘리트 지식인들의 정론지로 급부상,프랑스 최대 종합 시사주간지로 2000년대 초까지 위세를 떨쳤다. 페미니즘과 반전운동 등 진보진영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며 68혁명을 풀무질했고, 냉전과 중동사태, 독재ㆍ인권ㆍ식민지 이슈 등에도 발벗고 나서 발언했다. 낙태 금지법 폐지와 낙태 의료보험 적용을 요구하며 71년 보부아르 등 여성 명사 343명이 당시로선 불법이던 낙태 시술 경험을 공개한 ‘343 호소문(un appel de 343 femmes)’을 실은 매체도 누벨 옵스였다. 2004년 르몽드에 매각돼 지금은 ‘롭스(L’Obs)’라 불리게 됐지만, 다니엘은 2008년 은퇴할 때까지 기자 겸 칼럼니스트로 일했다.

누벨 옵스가 주요 이슈들을 ‘대변’한 반면, 장 다니엘은 20세기 거물 정치인들과의 친분과 특유의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며 주요 이슈들의 향배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상 막후 ‘플레이어’였다. 그는 프랑스 역대 정부의 비공식 고문이었고, 미테랑 정부는 그에게 두 차례나 대사직을 제안했다. 물론 그는 고사했지만, 미테랑 정부는, 63년 케네디가 그랬듯이 그를 민감한 사안에 대한 외교 특사로 여러 차례 활용했다. 아랍 주요 국가 수반들도 현안이 있을 때면 그에게 조언과 교섭을 청했다. 그는 75년 프랑코 사후의 스페인 민주화 과정에도 깊이 개입했다. 스페인 매체 ‘엘파이스(El Pais)’ 인터뷰에서 그 자신도 “몇몇 사안에 깊이, 과도하게 개입해 여러 국가의 정부수반들과 현안을 협의”했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역할을 은근히 즐겼고, 자신의 위상을 자랑스러워했다. 2005년 그를 만난 뉴욕 북오브리뷰의 아담 샤츠(Ada, Shatz)는 “구김 하나 없는 정장 차림으로 20세기 거물 정치인들의 이름을 줄줄이 읊던” 그를 “마치 정치인이나 외교관 같았다”고 썼다. 롭스는 “프랑스의 가장 도드라진 저널리스트”인 그의 부고를 전하며 “그는 (20세기 역사의) 증인이자 배우(actor)였고, 세계의 심판(conscience of this world)이었다”고 썼다.(nouvelobs.com) 그건 프랑스 저널리즘의 맥락에서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의 사상은, 카뮈의 사상의 근간이기도 했던 반폭력과 휴머니즘이었다. 2004년 오스트리아 왕실이 수여한 ‘커뮤니케이션과 휴머니티 어워드’ 시상식에서 그는 ‘폭력을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해 테러리즘에 맞서면서 목적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행위를 용납해선 안 된다. 수단이야말로 목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요소다”라고 말했다. 앞서 61년 야전병원에서 부상 치료를 받던 그는 알제리 해방전쟁에 가장 맹렬히 가담했던 프란츠 파농의 병문안을 받고 “파농의 용기와 카리스마와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근작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Wretched of the Earth)’의 폭력 옹호 논조와 사르트르의 선동적인 서문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었다”고 회고록 ‘상처(La Blessure)’에 썼다.

문학청년 시절의 그를 매료시켰던 앙드레 지드는 1926년 벨기에의 지배를 받던 아프리카 콩고를 여행한 뒤 식민지의 비참을 기행문 ‘콩고여행’에 소개하며“(나는) 목소리가 즉각 대중에게 미치는 저널리스트들이 부럽다. 지금까지 나는 거짓된 도로 표지판들을 믿고 돌아다녔던 것 같다”라고 쓴 적 있었다. .당시 수많은 지식인들이 휴머니즘의 윤리와 반제국주의의 열정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됐듯이 지드 역시 57세에 공산주의자가 됐고, 10년 뒤인 1936년 친구인 막심 고리키의 장례식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가 스탈린 체제의 폐쇄적 획일주의에 환멸을 느껴 ‘소련 기행Retour de L’URSS)’을 출간하며 탈공산주의를 선언했다. 그건 공산주의에 대한 다니엘의 애증의 경로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와 누벨 옵스는 프랑스 우파들로부터 냉전기 모스크바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받곤 했고, 솔제니친의 망명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적극적인 동조 등 몇몇 사안을 두고는 프랑스 공산당(PCF)을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라 비판 받았다. 하지만 그는 르몽드 인터뷰에서 “나는 끝내 좌파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앙가주망의 대부 사르트르가 숨지던 1980년 진보 격월간지 ‘르디바 Le Debat(논쟁)’를 창간한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 1931~)는 창간사에서 “(사르트르와 더불어) 지식인의 대중적 사명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제 지식인들은 “현실 참여의 당파적 활동가(partisan)가 아니라 현실의 분석가(analyst)가 돼야 한다”고 썼다.(newstatesman.com) 작가겸 저널리즘 학자 레지 드브레는 2000년 ‘지식인의 종말(강주헌 옮김, 예문)’이란 책으로 에밀 졸라와 사르트르, 지드 등 사회적 사명을 진지하게 수행하며 모범적 앙가주망을 구현한 ‘최초의 지식인’들과 구분해 근년의 소위 지식인들 즉 “텔레비전에 얼굴이나 비치려 하고 사인회나 여는” 20세기 말 이래의 ‘최후의(말기적) 지식인’들을 통렬히 비판하며 그들을 집단 자폐와 도덕적 자아도취, 매스컴 애호증의 타락인들로 조롱한 바 있다. 장 다니엘은 마지막 ‘최초의 지식인’이었고, 최초의 ‘최후의 지식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그와 함께 한 시대가 저물었다.

그는 누벨 옵스의 공동 설립자인 경영인 클로드 페르드리엘(Claude Perdriel, 1928~)의 전처 미셸 반시용(Michele Bancilhon)과 66년 결혼, 딸 한 명(롭스 기자)을 두었다. 드브레에 따르면 가장 대표적인 ‘최후의 지식인’인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한 매체에 기고한 장황한 부고의 끝에 다니엘이 숨지기 얼마 전 다니엘이 그에게 “죽음의 가장 나쁜 점은 이제 미셸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라 했다고 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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