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래요” 해고 벼랑 맨 앞 떠밀린 취약층

입력
2020.04.02 01:0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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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양극화, 불편한 민낯] <1> 체감도 다른 실직의 공포 

 원청사는 무급휴직 등 고용 유지, 하청은 정리해고ㆍ희망퇴직 거센 압박 

 “온통 흉흉한 얘기뿐… 잔인한 4월 되나” 하청노동자들 조마조마 

1일 인천공항에서 근무하는 청소 노동자가 공항철도로 넘어가는 무빙워크를 청소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1일 인천공항에서 근무하는 청소 노동자가 공항철도로 넘어가는 무빙워크를 청소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무급휴직을 안 쓰겠다고 버티면 팀장님이 개별 면담을 하자고 불러서 권고사직을 얘기해요. 옆 팀에서는 벌써 그만둔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들리고요.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버티겠어요.”

아시아나항공의 인천공항 출입국 업무를 지원하는 하청업체 KA의 직원 A(27)씨는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한국일보와 인터뷰한 1일에도 회사는 ‘전 직원이 2달간 무급휴직을 하라’는 공지를 반복했다. 휴직하면 당장 월 200만원의 수입이 사라지지만 A씨와 동료들에겐 선택지가 많지 않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위기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실업자가 되느니 차라리 무급으로라도 일자리를 부지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하청업체에선 해고를 감행했다는 소식은 그를 더욱 옥죄고 있다.

신종 코로나 유행 장기화는 노동시장에 ‘잔인한 4월’을 예고하고 있다. 3월 한 달간 질병이 휩쓸고 간 여파는 대규모 감원으로 나타날 조짐이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모두를 겨냥하는 것과 달리, 고용악화는 사회의 약한 고리부터 먼저 끊어가고 있다. 신종 코로나가 잉태한 고용불안이라는 이름의 칼날은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원청직원보다 하청직원의 일자리를 더욱 잔인하게 난도질한다.

고용보험 가입 여부에 따른 신종 코로나 고용대책 차이
고용보험 가입 여부에 따른 신종 코로나 고용대책 차이

고용불안의 양극화는 항공산업에서 일찌감치 두드러졌다. 인천공항의 하루 이용객은 지난해 12월 약 20만명에서 3월 말 약 1만명으로 95%가량 급감했다. 악조건은 같지만 고용주들의 대응은 원ㆍ하청이 갈린다. 원청사가 직원에 10~15일간 무급휴직을 실시하거나(아시아나) 일부 직원에 장기휴가조치(대한항공)를 한 반면 하청업체에서는 해고의 삭풍이 분다. 한국공항의 하청업체 선정인터내셔널, 아시아나 하청업체 AHㆍKO에서는 많게는 인력의 50%까지 감축하는 정리해고ㆍ희망퇴직을 시작했다. 대한항공에 기내청소노동자를 파견하는 EK맨파워는 이미 지난달 단기계약직 50여명을 먼저 해고했고, 정규직 200여명에 대한 감원도 준비하고 있다. 이경호 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 조직국장은 “하청업체들은 3월까지는 무급휴직을 연장해가며 버텼지만 4월부터는 줄줄이 정리해고를 할 조짐을 보인다”며 “휴직은 늘어도 해고 얘기는 나오지 않는 원청과 달리 가장 밑바닥에 있는 도급사부터 여파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대책조차 하청ㆍ특고 노동자에 언감생심 

위기가 닥치면 하청업체 노동자부터 어려움을 겪는 건 구조적ㆍ고질적인 문제다. 비행기 편수나 공항 라운지 이용객 수에 따라 도급비를 차등 계약한 상황에서 원청이 어렵다고 손을 들면 하청도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은 긴급 재난대책조차 외려 고용불안 양극화를 키우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신종 코로나를 계기로 확대한 고용유지지원금 제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제도는 ‘고용유지조치 시행 후 1개월까지 인력변동이 없는’ 사업체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이는 수시로 인력을 재배치하는 파견ㆍ하청업체로선 지키기 어려운 부분이다. 고용부가 유급휴직수당의 90%까지 보전한다며 제도의 문턱을 낮춰도 많은 하청업체가 무급휴직이나 감원을 택하는 이유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는 “이처럼 파견용역, 사내하청 등에 해당돼 사실상 휴업급여를 받기 어려운 직장인은 지난해 8월 기준 전체 취업자(2,735만명)의 77.8%(2,127만명)로 추산된다”고 말한다.

고용안전망의 바깥에 놓인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노동자)들은 무급휴직조차 아쉬운 상황이다. 학습지 강사, 관광버스기사 등 사람을 대면하며 일하던 특고 노동자 상당수가 신종 코로나 사태 후 일자리를 잃었지만 고용보험이 없는 ‘개인사업자’라 실업급여는 꿈도 못 꾼다. 각 지자체가 이달부터 약 14만명의 특고노동자, 프리랜서에 최대 2개월간 50만원의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 정부가 이들을 위해 내놓은 첫 대책이다. 하지만 특고 노동자의 수가 약 221만명(2018년 기준)인데 비해 지원수준은 미미하다. 요가강사 B(34)씨는 “긴급지원금이 잠시나마 도움은 되겠지만 그 이후가 더 문제”라고 말한다. 그가 진행하던 5개의 수업은 3월 초 운동시설 집단감염 발생 후 모두 중단됐다. B씨는 “신종 코로나 위기가 끝나도 한동안은 수강생이 줄어들 거라 실업자 신세는 계속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노동계 “일시적 해고 제한해야” 

신종 코로나발 경제위기가 심화될수록 양극화의 골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노동계는 소득보전보다 고용유지정책이 더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노총은 지난달 30일 정부에 신종 코로나 유행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해고제한조치’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경영상 해고 요건을 강화하고, 일정 규모 이상 대량해고를 할 경우 고용부 장관의 승인을 얻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지난달 6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발표한 ‘코로나19 위기극복 노사정 선언’에는 인원조정 대신 고용을 유지하자는 노사합의가 담겨있지만 현장엔 벌써 감원이 시작됐다”며 “한번 해고가 시작되면 회복이 어려운 만큼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안전망 확대도 고용 취약층의 보호를 위해 시급한 과제다. 정부는 지난해 고용보험이 없는 영세자영업자, 프리랜서 등에 실업부조를 하는 ‘국민취업지원제도’를 마련했지만 이는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근거법인 ‘구직자 취업촉진 및 생활안정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계류돼 당장은커녕 당초 예정한 7월에도 시행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신종 코로나 이전에 이 같은 제도가 갖춰졌다면 고용충격에 보다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50%의 사각지대를 좁힐 포괄적 고용안정망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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