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선의 동물 그리고 사람 이야기]정치적 동물인 우리가 이젠 ‘동물을 위한 정치’를 해야

입력
2020.03.28 09:00
14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론(politika)’에 언급해 놓은 이 유명한 구절은 인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속성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을 우쭐하게 만들었던 가정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은 이성적 영혼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다고 가정했다. 물론 벌이나 개미, 두루미처럼 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들도 있지만, 이들이 ‘정치적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현재 많은 인지행동학자가 그 가정에 반론을 제기한다. 어떤 동물은 그들의 사회 안에서 충분히 정치적이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정치가 인간이 가진 다른 이들과의 정치적인 관계, 혹은 파트너십에 대한 천성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과 동물이 함께 이런 정치적 관계 안에 포함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동물권단체 ‘케어’로부터 유기견 ‘토리’를 건네 받았다. 토리는 청와대 첫 유기견 출신 ‘퍼스트 도그’가 됐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7월 동물권단체 ‘케어’로부터 유기견 ‘토리’를 건네 받았다. 토리는 청와대 첫 유기견 출신 ‘퍼스트 도그’가 됐다. 청와대 제공

◇동물친화적 정치인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동물과 생태에 대한 감수성을 증진 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반려동물 인구가 1,000만명이라는 추정치에 근거하면 무시하지 못할 수의 유권자들이 동물을 매개로 동질성을 갖는다. 사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 안에서 동물의 권익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총기 규제, 다양성 존중에 더 높은 지지를 보내며, 종교적 근본주의나 창조론에 부정적이다. 대개는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동물을 옹호하며, 젊은 층과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큰 지지를 보낸다. 이런 결과가 왜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공화당 지지자보다 고양이를 더 선호한다는 여론조사기관의 보도도 있었다. 물론 조사하는 사회의 특성이나 조사자의 문제의식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절대적인 판단 기준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반려동물을 안고 찍은 사진이나 유기동물 입양에 앞장서고 길고양이를 보호하고 야생동물을 보전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이미지는 어떤 정치인에게도 손해될 것이 없다. 정치 성향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 유권자들에게도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따뜻한 후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좋은 이미지가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동물과 관련된 정책들은 방향성을 갖지 못하고 사건별 민원 해결 수준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어 아쉽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훨씬 더 치열한 정치 활동으로 동물의 이익을 대변해왔다.

1906년에 설립된 최초의 갈색개 동상. 위키백과
1906년에 설립된 최초의 갈색개 동상. 위키백과

◇동물의 편에 함께 서다

동물생체해부반대 운동으로 잘 알려진 갈색 개 사건(Brown Dog Affair, 1907)을 이끌었던 두 여성은 런던여자의학교 학생들이었다. 리치 린드 아프 하게비(Lizzy Lind af Hageby)와 라이자 카테리네 샤르타우(Leisa Katherine Schartau)라는 스웨덴 출신의 두 여성이 킹스칼리지에서 시행되고 있던 생체해부실험에 참관하여 이 상황을 기록하고 알리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당시 유럽에서 핀란드를 제외하고는 여성과 노동자계급 남성들은 선거권이 없었다. 특히, 하게비는 여성참정권 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고 여성에 대한 억압과 부조리가 동물에 대한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여성주의와 동물권 운동은 다른 게 아니었다.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로 인해 당시 실험을 주도했던 윌리엄 베일리스 교수는 지탄을 받았다. 베일리스 교수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던 한 변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두 여성은 재판에서 증언으로 실상을 알렸다. 그러나 결국 재판에서 베일리스 교수는 승소했고 변호사는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재판 이후 두 여성은 실험에서 희생된 갈색 테리어종 개를 기리는 동상을 한 공원에 세웠다. 이 개는 당시 베일리스 교수의 실험실에서 반복적으로 마취 없이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고 결국 실험대 위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갈색개 동상에 적힌 문구에 분노한 런던 의대생들이 동상을 부수려다 체포되는 일이 생기면서 다시 큰 싸움이 시작됐다. 한편에는 과학연구와 의료인들을 폄훼한다고 분노하는 의대생들이, 다른 한편에는 여성참정권자들과 노동자단체가 섰다. 여성참정권자들은 하게비와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동물에게서 여성을 봤다. 당시 동상이 세워진 배터시 지역이 빈민가인 탓도 있지만, 노동자단체는 의사들을 부유한 상류 기득권층으로 보고 ‘동물뿐 아니라 빈민층 역시 의학실험에 쓰일 수 있다’는 공포와 반발심으로 이 운동에 동참했다. 결국, 이 혼란에 지쳐버린 시의회가 동상을 철거했다. 110년 전의 일이다.

물론 베일리스 교수가 명예훼손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해당 실험은 생체해부에 대한 왕립심의회(Royal Commission) 조사를 받았다. 심의회는 동물실험에서 동물을 마비시키는 약으로 쓰인 독약의 사용을 금지하고 향후 적절한 마취를 행할 것을 권고했다. 영국에서 여성과 노동자계급 남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계기는 1918년 국민대표조례(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를 통해서였다. 당시 참정권을 갖는 여성은 30세 이상으로 제한됐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21세 이상이면 참정권을 갖게 될 때까지 여성은 10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동물들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저작권 한국일보]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 주관으로 2018년 7월 17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 개도살 금지 정책 발표'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이 단체 회원들이 불법개농장에서 수거 해온 죽은 강아지 사체를 상여에 싣고 청와대 를 향해 행진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2018-07-17(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 주관으로 2018년 7월 17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 개도살 금지 정책 발표'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이 단체 회원들이 불법개농장에서 수거 해온 죽은 강아지 사체를 상여에 싣고 청와대 를 향해 행진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2018-07-17(한국일보)

◇동물에게 기본권을

지난 반세기 동안 동물의 윤리적 지위에 대한 논의의 승자는 분명해 보인다. 고통과 쾌락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서 동물의 윤리적 지위는 견고하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사회 제도 안으로 들어왔다. 동물학대방지법, 동물복지법, 동물보호법 등 명칭은 다르지만, 동물을 배려하는 법들이 생겨났고 이를 위반할 경우 처벌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쉽게 ‘동물권’이라 부르는 정도의 권리는 사실 ‘인도적인 처우’나 ‘학대 방지’에 머무른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가 동물에게 허용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이 약간은 보장되고 있는 셈이다.

윤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민권 개념도 동물로의 확장이 시도되고 있다. 동물 시민권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특히 개처럼 가축화돼 인간 사회 속에서 역할을 담당하는 동물들은 이미 많은 정치적 변화의 중심에 서 있고, 이를 통해 정치에 포함되어 있으며 확장된 의미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반드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의견을 내고 선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예를 찾을 수 있다. 식용견 도살과 판매에 대한 지자체의 자발적인 중단 노력, 2018년에 있었던 개 전기 도살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사역견의 동물실험 금지를 이끌어냈던 시민 활동 등은 명백하게 정치적 활동이다. 한 단계 더 나가보자. 인도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일부 동물에게 확장된 시민권을 보장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우리에게 가까운 반려동물부터, 현실적인 문제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 사회 속 반려동물들은 어떤 의료 기본권을 갖고 어느 정도의 공공 의료 혜택을 받아야 하는가. 재난 상황에서 반려동물들에 대한 지자체의 대비가 필요한가. 반려동물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대중교통 수단은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가. 새로 들어서는 공공주택은 반려동물을 위한 공간을 의무적으로 마련해야 하는가. 재개발 지역의 건축업자는 유기동물과 길고양이 같은 경계동물을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 동물매개활동에 참여하는 동물들의 노동 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계획은 시민사회 혹은 정부의 책임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개인의 문제인가. 그렇다면 그 개인들과 수의사, 보험회사, 버스회사, 건축업자가 각각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가.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국가의 자원을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해도 될 것인가. ‘동물보유세’라는 명칭으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세금 이슈는 어찌 보면 이런 문제들 가운데 한 사례이다.

이런 결정은 사실 정치의 영역에서 이뤄진다. 동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다. 소유주이면서 보호자인 인간은 소유물이면서 동시에 가족인 이 애매한 존재들에게 윤리적인 책임이 있다. 윤리적인 책임이 있는 인간 대리인들은 동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 단순히 동물보호단체만이 대리인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안일하다. 왜냐면 현재 우리나라 총 가구의 20%가 이런 동물의 이익과 직접 관련이 있고, 그 대상이 되는 동물은 개, 고양이만으로도 서울시 인구와 비슷한 수에 이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그룹도 이 정도의 규모에 이르지는 못한다. 태생적으로 정치적인 우리에게 있어 ‘동물 정치’는 이제 웃어넘길 말장난이 아니다.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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