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현란하거나 암울하게... 색감으로 스크린 품은 ‘色의 마술사’ 정일성

입력
2020.02.15 04:30

 

 <49> ‘거장의 눈’이 됐던 정일성 촬영감독 

 ※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며 영화보다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를 통해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지난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삿말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일성 촬영감독은 1929년 2월19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냈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자랐다. “규슈(九州)의 야하타 철공소를 체험한 뒤엔 공학을 해야겠구나, 나라를 되찾으려면 공학으로 기여할 수 있겠구나. 그런 다짐을 했어요.”

해방 후 고국에 돌아온 정일성은 6개월간 한글과 천자문, 한국 문학, 역사를 공부하면서 민족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했고. 결심한 바대로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인생 진로는 크게 뒤바뀌게 된다. 부산에 피란한 그는 미 공보원에서 근무하던 중 대구로 출장을 갔는데, 정훈감실 소령으로 촬영기사 일을 하던 대학 선배의 권유로 공군홍보 영화 현장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기술에 대한 장인정신과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영화는 이후 그의 삶에서 평생 지속하는 화두가 된다.

김학성(배우 최은희의 전 남편) 촬영감독의 조수로 도제 생활을 하며 촬영 기술을 공부한 정 감독은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1957)로 입봉했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빠른 출발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에 작업한 편수가 많지 않았고, 이성구 감독의 ‘지하실의 7인’(1969) 정도 말고는 두드러진 작품도 없었다. 한국 영화 산업의 호황기인 1960년대였다지만, 그의 눈에 보인 당시 충무로는 ‘날림으로 만든 으악새 영화(당시 액션영화에 대한 지칭. 등장인물들이 으악 하며 쓰러진다고 해서 붙여짐)’ 아니면 ‘홍콩영화의 아류작들이 설치던’ 한심한 시절이었다. 한국영화의 현실을 두고 예술가로서의 고민과 회의에 빠진 그는 다른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1977)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테크닉을 통해 완성도 높은 토속 스릴러가 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참관 

1961년 정 감독은 아시아영화재단의 지원을 통해 1년간 일본 연수를 가게 된다. 어떤 제작진과 일해 보고 싶은가 질문을 받자 정 감독은 ‘라쇼몽’(1950)과 ‘7인의 사무라이’(1954)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팀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일본에 있는 문화원을 드나들며 그때까지의 구로사와와 잉마르 베리만의 모든 작품을 섭렵한 정일성은 3개월이 지나 마침내 구로사와 팀의 현장에 참여하게 된다. ‘붉은 수염’(1965)의 촬영이 한창일 때였는데, 액션 장면에 3대의 카메라가 돌아가던 중 촬영기사 한 명의 자리가 비게 되자 정일성이 B카메라를 대신 잡게 됐다. 세계적 거장 구로사와의 작업 스타일을 목격한 이때의 경험은 두고두고 엄청난 공부가 됐다고 그는 회고한다. 70년대 초에 들어서 정일성은 베리만과도 만나게 되는데 이때 베리만이 해준 조언은 그의 촬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누구든지 잡을 수 있는 앵글을 잡아라. 하지만 누구든지 네 앵글을 흉내 내려면 고도의 계산 없이는 잡을 수 없는 앵글을 잡아라. 완벽한 앵글을 잡은 다음에 그것을 일관된 계산에 의해 흩트려라. 그것이 프로가 하는 일이다.”

“낮에는 테스트하고 밤에는 현상해서 그 다음날 김기영 감독과 색을 분석하면서 캐릭터와 색 심리학을 연결했다. 인물이 어떤 색의 옷을 입을 때 어떤 심리인가. 그렇게 색이 결정되면 감독과 둘이서 세트장의 벽을 칠하고 디자인한 전등과 가구를 배치했다.”(이연호 저 ‘전설의 낙인’)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 합류하면서 촬영감독 정일성의 예술적 창조성은 만개하기 시작한다. 대학 선배였던 김 감독을 먼저 찾아간 정 감독은 촬영료를 받지 않다시피 하면서 아이디어 구상부터 소품과 세트 제작에 이르기까지 영화 작업의 모든 단계에 참여했고,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남과 여’(1966)를 각 장면별로 하나씩 뜯어보는 등 새로운 감각의 영상언어를 습득하고자 노력했다. 한국영화의 침체기로 꼽히는 70년대에 김 감독은 도리어 ‘충녀’(1972), ‘파계’(1974),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1977) 등 손꼽히는 역작을 대거 빚어내며 작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모든 작업은 감독의 비전과 상상력을 이해하고 충실히 구현한 테크니션 정 감독의 손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동창작자라 해도 좋을 만큼 긴밀했던 두 사람의 협업은 시대를 앞서가는 파격적인 컬러 활용과 감각적인 앵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정일성은 ‘색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충무로가 선호하는 대표적인 촬영감독이 됐다.

'춘향뎐'(2000) 촬영현장에서 정일성 촬영감독과 임권택 감독이 함께 작업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협업한 '만다라'(1981).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기영, 임권택의 눈이 되다 

“우선 나는 인물을 센터에 놓고 찍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건 의미가 없어요. 빈 곳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것도 작가정신 아닌가요. 회화나 사진의 여백은 인정하면서 왜 영화적 여백은 시도하지 않는지, 평소 그런 감독들에 대한 불만이 많았죠.”

정 감독의 카메라는 하루가 멀다 하며 한국영화사를 풍미한 명감독들의 현장을 종횡무진했다. 유현목 감독과는 ‘불꽃’(1975), ‘문’(1977), ‘사람의 아들’(1980)을 함께 하며 “인물을 거의 센터에 잡지 않고 사이드에 잡으면서 장면을 연결해가는” ‘걸쳐 찍기’ 프레임을 실험했고,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1977), ‘사랑의 조건’(1979), ‘만추’(1981)에서는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잡기보다는 주변의 풍경과 사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하고 화면의 여백을 열어두는 원숙한 경지를 보였다. 제작사 화천공사의 요청으로 합류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속 별들의 고향’(1978)에서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핸드헬드(손으로 들고 찍기) 촬영, 사선으로 기울어진 독특한 앵글을 사용해 청춘의 열기와 방황을 영상으로 표현해냈다. 그리고 카메라 고장으로 영화 전체의 초점이 맞지 않는 해프닝을 빚은 ‘신궁’(1979)을 통해 정 감독은 생애를 함께할 영혼의 동지를 만나게 된다. 바로 임권택 감독이었다.

변장호 감독의 ‘을화’(1977) 촬영을 연말까지 마치기 위해 강원 강릉으로 향하던 중 정 감독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 현장에서 스태프 두 명이 즉사했지만 감독과 그는 괜찮아 보였고, 촬영지인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파도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상이 없다고 바로 작업에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됐다. 충격으로 장기가 뒤틀린 상태로 찬 바닷물 속에서 4시간을 보낸 정 감독은 결국 쓰러졌고, 썩어 들어가는 장을 셋으로 잘라 플라스틱으로 연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몸을 다 추스르지도 못한 채 그는 현장으로 돌아갔다.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으로 1년 가까이 전국을 누비면서 무리한 정 감독은 휴식 없이 곧바로 ‘사람의 아들’ 촬영에 들어갔다. 과로인줄 알았던 몸의 이상은 직장암으로 판명됐고, 다시금 큰 수술을 감당해야 했다. 평소 75㎏였던 체중이 41㎏으로 줄어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만다라’(1981)는 아름답게 찍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수묵화처럼 암울하게 찍고 싶었어요. 우리의 현실이 처해 있는 현실의 아픔과 고통을, 색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거죠. 내가 찍은 영화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화면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한 번도 아름다운 걸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어요. 우리의 역사와 삶이 너무 아픈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프게 찍을 수 있을까 노력하는 거죠.”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할 정도로 절망에 빠져있던 정 감독에게 문병 차 찾아온 임권택 감독은 김성동 작가의 소설 ‘만다라’를 건넸다. 소설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새로 작업할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린 정 감독은 이대로 병실에 누워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적극적인 재활 운동에 돌입했고, 그가 회복할 때까지 임 감독은 기다려줬다. 붕대를 채 다 풀기도 전에 감독에게 로케이션 헌팅(촬영에 적합한 장소를 찾으러 다니는 일)을 가자고 전화를 걸 만큼 정 감독은 의욕에 차 있었다.

김기영 감독과의 작업에서 억압적인 시대 분위기를 거스르듯 현란한 색감을 추구했던 그는 ‘만다라’에선 반대로 흑백에 가깝도록 가라앉은 톤의 영상을 추구하며 암울한 시대에 처한 민중의 절망과 고통을 끌어안고자 했다. 이 작품을 계기로 굳게 맺어진 임 감독과의 파트너십은 ‘축제’(1996)와 ‘노는 계집 창’(1997)을 제외한 모든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는 걸로 이어졌고, ‘개벽’(1991)과 ‘서편제’(1993), ‘춘향뎐’(1999), ‘취화선’(2002) 그리고 ‘천년학’(2007)에 이르러 염원하던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정수를 얻게 됐다. 김기영 감독에서 유현목, 김수용 감독을 거쳐 이두용, 배창호, 그리고 임권택 감독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촬영감독 정일성의 카메라는 한국영화 반세기의 눈이 됐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한국일보 뉴스 네이버 채널 구독하기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1,324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