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칼럼] 감염병에는 국적이 없다

입력
2020.02.06 18:00
수정
2020.02.06 18:43
29면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것은 국가를 구분해 피아를 구별할 문제가 아니라 초국적으로 함께 대처해야 하는 일이다. 중국에서부터 그 감염병의 불길이 잡히지 않으면 이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studioconcrete 인스타 캡처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것은 국가를 구분해 피아를 구별할 문제가 아니라 초국적으로 함께 대처해야 하는 일이다. 중국에서부터 그 감염병의 불길이 잡히지 않으면 이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studioconcrete 인스타 캡처

지구 모양의 그림 위에 ‘LOVE FOR HUMAN’이란 글귀가 적혀 있는 영상을 클릭하면 ‘HUMAN’의 ‘H’와 ‘M’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그 위치를 바꾼다. 그래서 등장하는 글귀는 ‘LOVE FOR WUHAN’. 누가 봐도 그 의미가 뚜렷한 영상이 아닐 수 없다. 즉 ‘LOVE FOR HUMAN’이 뜻하는 ‘인류애’가 현재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봉쇄된 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국 우한 시민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지만 놀랍게도 이 영상을 SNS에 올린 유아인과 송혜교는 의외의 비난을 받았다. 유아인이 소속된 아티스트 집단인 스튜디오 콘크리트가 제작한 이 영상이 던지는 메시지는 ‘우한 시민들에 대한 위로’였지만 그 메시지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현실감이 없다”며 “자국민 언급이 우선”이라는 비판이었다. 나아가 이 메시지가 중화권 팬들을 의식한 두 배우의 상업적 의도가 들어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엉뚱한 반응들이 나오게 된 걸까.

누리꾼들의 비판들을 들여다보면 2002년 11월 중국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됐던 사스는 물론이고, 한중 간 갈등을 일으켰던 사드 사태, 그리고 이제 일상적으로 공기를 체크해야만 하는 미세먼지 문제나, 최근 홍콩 시위로 불거진 중국에 대한 반감이 골고루 겹쳐져 있다. 중국은 늘 우리에게 가해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에 대한 ‘사랑’ 운운하는 일은 심지어 중국의 책임회피를 돕는 것이라는 논리까지 담겨 있다. 여기에 서민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라 여겨지는 연예인에 대한 막연한 반감 또한 더해졌다.

그런데 과연 이 영상이 그런 비판을 받을 만큼의 소지가 있었을까. 그건 인류애적 차원에서 우한 시민들을 위로하는 영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는 한중 관계가 사드 사태 등을 통해 악화되고, 한일 관계가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로 악화됐을 때 이런 선택을 한 중국 정부나 일본 정부를 비판해 왔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싸잡아 적으로 세울 만큼 비이성적이지는 않지 않은가. 유아인과 송혜교가 올린 영상은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쉬쉬하며 늑장 대처를 한 중국 정부 때문에 위험에 노출된 채 고립된 우한 시민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SNS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라며 현 사태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한 시민들을 위한 지지와 위로.

사실 감염병처럼 집단적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상황 속에서 어떤 주체적 선택과 행동을 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질병과 그 질병을 앓는 환자를 동일시해 가해자로 규정하거나, 위험한 타자로 규정하는 일은 질병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위험한 타자로 규정하는 순간 그 타자에 대한 폭력이 자동적으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감염자들은 피해자들이지 ‘윤리적 단죄’를 받아야 하는 가해자들이 아니다. 감염병이 무서운 건 그 치사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벌어질 수 있는 감염자들에 대한 배제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화제가 되고 있는 2013년 개봉한 영화 ‘감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체들을 살처분하는 광경이다. 그 안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생명이 있지만 이미 그곳에 격리되고 버려진 이상 그들은 더 이상 생명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감염자들은 마치 응당 그런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이나 된 것처럼 처리된다. 그 영화에서 더 끔찍한 건 전혀 통제되지 않는 정부의 컨트롤타워가 바이러스와 싸우기보다는 정치적 입지를 두고 들끓는 민심들을 향해 오히려 총구를 겨누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런 영화 속 장면이 현 사태 속에서도 비슷하게 오버랩 된다는 사실은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마스크 300만개를 중국에 지원해 준 사실을 두고 여야가 공방을 벌이는 현실은 이 글로벌한 위기 속에서도 이를 정파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런데 마스크 300만개를 이야기하며 ‘우리 마스크’ 운운하는 그 정파적 말에 담겨 있는 것 역시 공포와 배제의 논리가 담겨 있다. 도대체 감염병에 국적이 있던가. 물론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것은 국가를 구분해 피아를 구별할 문제가 아니라 초국적으로 함께 대처해야 하는 일이다. 중국에서부터 그 감염병의 불길이 잡히지 않으면 이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국가 간의 이슈가 이 문제에 우선될 수는 없다.

그나마 이번 사태에서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보여 준 건 중국 우한 거주 교민들을 포용한 아산과 진천 주민들의 놀라운 시민의식이다. “이 곳에 오는 교민들도 대한민국 국민들”이라며 “편히 쉬고 돌아가길 바란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격리되어 있던 우한 교민들이 남긴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화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포와 배제의 논리가 아닌 공감과 수용의 논리가 불러온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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