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의 화해] 동거남이 원치 않는 아이 … 혼자 낳아 기를 수 있을까요

입력
2020.02.03 04:30
수정
2020.02.03 07:2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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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작권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작권한국일보]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임신 8주차에요.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 남자친구와 2년 넘게 동거하다 갑작스레 아이가 생겼어요. 그는 나이가 많지만 절 함부로 대하지 않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혼의 아픔에다 아이 둘이 있어요.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아요.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아이를 낳지 말자고 했어요. 남자친구에게는 아주 어린 막내 동생이 있는데, 동생은 나이 많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파서 누워 있는 모습뿐이었다고 했어요. 뱃속의 아이에게 자신은 그런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그는 제게 너무 미안해해요. 사랑해주고 아이까지 가져줘서 고마운데 낳지 말자고 하는 게 정말 미안하다며 저를 안아주며 토닥거려 주었어요.

저도 그의 상황을 이해합니다. 그가 밉거나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차마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요. 평생 이 아이가 떠오를 것 같아서 사랑하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제가 먼저 관계를 정리하자고 했어요.

저는 아이를 낳고 싶어요. 주변에선 다 말립니다. 나중에 아이가 원망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혼자 아이를 어떻게 감당할 거냐고, 아이의 인생마저 불행하게 만들 거냐고 말이예요. 저도 하루에 수천 번 고민합니다. 하지만 고민을 하는 것조차 뱃속의 아이에게 미안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전 어렸을 때 엄마가 없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 갔다 와보니 엄마가 사라졌어요. 아빠는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늘 바쁘고 무신경했어요. 한참 뒤에 가족관계증명서를 떼 보니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있었어요. 아빠, 친척들, 심지어 제가 태어났던 병원 의사, 그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호적에 이름을 올릴 때 엄마가 없어서 그랬다고만 했어요. 어른이 돼서 엄마를 다시 만났어요. 엄마는 아빠와 이혼한 뒤 만난 사람들에게 이혼했단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니 밖에서는 자기를 이모라고 부르라 했어요. 제게 너무 큰 상처였어요.

저는 존재를 부정당했던 그 경험을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아요. 저는 미혼모가 부끄럽지 않아요. 하지만 주변 말처럼 나중에 아이를 상처 받게 하는 나쁜 엄마가 될까 봐 두렵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서 잘 기를 수 있을까요.

이소희(가명ㆍ29세ㆍ계약직)


소희씨.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입니다. 뱃속의 아이도 그래요. 저는 의사로서, 성인으로서 절대로 그 아이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출산을 말리는 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역설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현실적인 어려움보다는 이 우주의 유일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 당신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당신은 이미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을 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아이를 지키려고 헤어졌어요. 주도적인 결정이었어요.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훌륭한 엄마에요.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싶은 걱정보다 당신 내면의 갈등 때문에 힘들었을 거에요. 인간은 태어나고 살아가면서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자아상이 형성되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지요.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핵심갈등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이것을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다루어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내적 성장과 성숙을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기를 본능적으로 원해요. 이것을 의존적 욕구라고 하지요. 그 기억과 경험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에요. 보호가 필요할 때 ‘아 우리 부모가 나를 보호해주네’, 힘들 때 ‘아 우리 부모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구나’라는 그 느낌 말이에요. 사랑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자녀에게 잘 표현해 사랑 받는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외로울 때 옆에 있어주는 것 같은 그런 경험 말이에요. 본능적 욕구이기에 잘 채워지지 않으면 결핍이 생기고 그 결핍을 메우려 평생 애를 쓰고 살지요.

소희씨, 안타깝지만 당신은 그런 경험과 느낌을 충분히 받지 못했어요. 어떤 설명이나 작별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엄마, 그리고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라 하는 엄마는 당신을 혼란스럽게, 좌절케 했을 거예요. 당신을 뿌리째 흔들었을 거예요. 부모를 원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희씨가 자신을 알아차림으로써 내면의 성장을 하고, 이후 인생이 좀 더 편안했으면 합니다.


당신에게 어느 날 찾아온 뱃속의 아이는 당신에게는 존재 그 자체일 거에요. 당신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일 거예요. 당신에겐 조건 없는,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소중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사랑이 굉장히 부족한데, 아이가 당신에겐 그런 대상이에요. 경제적 어려움, 미혼모라는 상황, 차가운 시선과 편견, 아이의 불행에 대한 우려 같은 것 보다 이 아이가 소희씨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걸 기준으로 다른 일을 결정하는 그런 경험을 시작한 거지요.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당신 내면의 결핍이 많이 메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까지 아이를 지키려고 했던 것은 엄마로서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아이가 당신 존재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그 동안 당신은 나는 왜 버림을 당했나, 생각하며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을 거예요. 그런데 아이가 생겨 당신은 당신 인생의 주인공이 됐어요. ‘나는 이 아이의 엄마야’ ‘나는 어떤 상황이 와도 이 아이를 버리지 않아’ ‘나는 누가 뭐래도 아이를 지키겠어’라는 생각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았을 거예요. 그럼으로써 당신은 내면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을 거예요. 아이를 통해 당신은 단단해졌어요. 당신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당신 내면의 비워져 있었던 부분들이 오히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키우면서 메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아이를 낳고는 아이 아빠에게 연락하는 것이 좋습니다. 서로 싫어해서 헤어진 게 아니라 아이를 잃을까봐 헤어졌기 때문에 두 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이를 낳기 전에 상황을 판단하는 것과 아이가 태어난 뒤 상황을 판단하는 건 또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만큼은 아이 아빠에게 알려주세요.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어리석은 실수도 하지만, 동시에 바뀐 상황에 맞춰 합당한 결정을 할 수 있는 힘도 있지요.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 아빠와 의논하고 이후 상황을 합당하게 처리해나가시기를 조언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소희씨.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들어요. 당신이 아이를 키우면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힐 거예요. 아이를 키우면서 아마도 당신은 당신의 결핍이 건드려지고, 그것 때문에 힘든 부분들 또한 생길 거예요. 흔히 사랑 받아본 사람이 아이도 잘 키운다 하지만, 그 경험이 부족하다고 반드시 아이를 못 키우는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하세요. 단단히 각오해야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잘 헤쳐갈 거라고 믿어요.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도움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신은 힘들다고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에요. 끊임없는 내면의 갈등에도 당신은 이제껏 늘 옳은 방향으로 걸어왔어요. 당신은 착하고 바른 사람일 겁니다. 이제껏 당신이 그렇게 해왔듯, 아이와의 관계도 잘 만들어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겪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 사회의 편견일 거예요. 그 점 때문에 제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망정 손가락질, 비난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언제라도 당신 편에 서서, 당신이 도와달라 할 때 당신 손을 잡아줄게요. 소희씨,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이 순간이 후회가 할 수도 있어요. 인간은 늘 후회를 하니까요. 하지만 그 때 그 당시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지금 당신의 결정은 최선일 거라 저는 생각해요. 당신의 결정은 참 잘한 겁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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