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의 영웅’ 고향 가는 길에 봇물 터지듯 황톳빛 폭포수

입력
2020.02.01 10:00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32> 산시 ④ 이자성의 고향 미즈

이자성의 고향인 산시성 미즈로 가는 길에 만난 황하의 후커우폭포. 잉어가 용문을 거슬러 오른다는 ‘리어도용문(鯉魚跳龍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사마천의 고향 한청에서 이자성행궁이 있는 미즈(米脂)로 간다. 북쪽으로 직선거리 260km 떨어져 있다. 두 도시 동쪽에는 거대한 황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해 대중교통이 아주 불편하다. 황하를 경계로 두 성이 나뉘어 있어 성을 넘나들어야 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둘 다 ‘산시성’으로 쓰지만, 한자 발음은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이다. 산시(陝西) 고도용문(古渡龍門)을 지나 산시(山西) 우문구(禹門口)로 가는 길이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1606~1645)이 수도를 향해 황하를 건넌 지점이다.

한청에서 황하를 건너 허진으로 가는 기차에서 본 풍경.
황하의 후커우폭포. 왼쪽은 산시(陝西), 오른쪽이 산시(山西) 땅이다.
대지를 삼킬 듯 쏟아지는 후커우폭포.

잉어가 용문을 거슬러 오른다는 ‘리어도용문(鯉魚跳龍門)’ 전설이 있다. 과거 시험을 통과하거나 출세한다는 뜻이다. 공부라는 게 황하를 거슬러 오를 정도로 힘든 일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황하에 도저히 잉어가 거슬러 오르기 힘든 지점이 있다. 강물이 폭포가 돼 떨어진다. 후커우폭포(壺口瀑布)로 가기 위해 허진에서 옌안 행 장거리 버스를 탔다. 3시간가량 달리니 황하가 보인다. 버스는 황하 다리를 건너자마자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온다. 몇 명 내려주더니 다시 고속도로로 사라진다. 알아서 가라는 이야기다. 택시 타고 10분, 폭포 입구에 도착했다.

과연 명불허전! 물이 흐르다가 절벽을 만나 급하게 추락한다. 낙차는 5m 정도다. 강폭이 좁은 구간은 겨우 3m다. 폭포는 양쪽에서 동시에 떨어진다. 크고 작은 폭포가 몇 개인지 모른다. 황토를 머금고 떠내려오니 가속도가 붙은 느낌이다. 거칠게 쏟아진 황하는 상대적으로 약한 부위를 지속해서 파고든다. 물이 떨어지는 소(沼)는 점점 깊어진다.

황하의 후커우폭포 양쪽 모두 관광지다.
황톳빛 후커우폭포에서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다.

후커우폭포로 성 경계를 나누다 보니 양쪽 모두 관광지다. 어디서 봐도 폭포는 장관이다. 낙하한 물방울은 강 높이를 뛰어넘어 튀어 오른다. 운무로 번져 옷을 적시고 땀과 섞인다. 잉어가 연어만큼 힘이 센지 모르겠지만, 솟구쳐올라 용을 써도 이 ‘용문’을 넘긴 어려워 보인다. 과거 급제를 잉어와 용문으로 비유한 까닭이 아닐까? 폭포를 배경으로 말 한 마리가 서 있다. 장원급제해 금의환향하는 장면 연출이 필요해서일까? 모두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잉어를 담을 수는 없지만, 튀어 오르는 황톳빛 강물을 담으려고 삼각대를 세우기도 한다. 햇볕 피하는 양산으로 운무를 막기도 한다.

미즈 역의 조형물.

황하 북쪽이 미즈지만 강변 도로가 없어 우회한다. 택시 타고 서쪽으로 1시간, 이촨(宜川) 터미널로 간다. 버스를 타고 다시 더 서쪽으로 2시간, 푸센(富縣) 역까지 이동한다. 다시 기차로 4시간 걸려 미즈 역에 도착하니 오후 9시다. 폭포에서 약 1시간 머물고 온종일 대중교통을 이용한 셈이다. 역에서 걸으면 이자성행궁까지 2km다. 부근 호텔까지 천천히 걷는다. 조명에 비친 횃불 위에 북과 장구, 꽹과리 치고 피리 불고 춤추는 조형물이 반갑게 환영한다. 민란 영웅의 고향에 당도한 사실이 실감 난다.

미즈의 이자성행궁 안내판.
미즈 도심의 판룽산 석패방.
이자성행궁 입구.

15만명이 거주하는 미즈 거리는 한산하다. 옛 지명은 은주(银州)다. 예부터 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조금 걸으니 이자성행궁 안내판이 보인다. 빌딩 숲에 둘러쌓인 석패방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용 문양이 금방이라도 승천할 기세다. 황제에 오른 인물에 대한 예우다. 행궁 정문이 바로 앞이다. 해발 800m 얕은 판룽산에 살포시 앉은 모양이다. 문 앞에 이르니 파란 하늘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자성은 양치기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변방 군인으로 살았다.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세금 징수가 폭등한다. 목숨조차 유지하기 힘든 가난이 지속되고 큰 가뭄이 들자 군량 보급이 중단된다. 숭정 3년, 1630년에 군인 이자성은 봉기한다. 명나라 말기 민란의 소용돌이로 들어서게 된다.

‘반용성경’이라 쓰인 석패방.
이자성 동상과 행궁.
마오쩌둥 편지가 적힌 이자성 동상 모습

반용성경(盤龍聖景) 석패방이 보인다. 성스러운 장소라는 자랑이다. 칼 들고 입 꾹 다문 이자성, 말발굽조차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동상이 의연하다. 대순제이자성장군(大顺帝李自成將軍)이라 쓴 필체가 익숙하다. 마오쩌둥의 글씨는 워낙 독특하고 개성이 강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마오쩌둥은 1944년 미즈 출신인 산간닝변구(陝甘寧邊區, 산시ㆍ간쑤ㆍ닝샤를 포괄하는 변경 지구) 부주석 리딩밍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자성을 언급했다. 편지 일부를 동상 아래에 적었다. 복사본은 행궁 안에 전시돼 있다.

마오쩌둥이 리딩밍에게 보낸 편지.

편지 글은 리딩밍의 친구인 리젠허우에 대해 칭찬한다. 리젠허우는 역사소설 ‘영창연의(永昌演义)’의 작가다. 이자성이 건국한 대순국(大順國)의 연호인 ‘영창’을 제목으로 했다. 소설에 대한 격려를 전달해달라고 한다. 이어 진나라 이후 2,000년 역사를 변화시킨 농민전쟁을 평가하고 ‘이자성이 일으킨 민란이야말로 산시 사람들의 영광’이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편지 이후 소설 제목은 자연스레 ‘대순황제 이자성’으로 바뀐다. 소설가 야오쉬에인이 30년에 걸쳐 330만자 분량으로 쓴 장편 역사소설 ‘이자성’의 저본이 됐다.

이자성은 봉기 6년 후인 1636년 옌안에서 토벌군을 대파했다. 옌안은 고향과 불과 200km 거리다. 금의환향하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와 열렬히 환호했다. 고향의 백성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관리를 위무하고 관청을 침공하지 않았다. 문묘를 중건하고 인재 양성을 위해 은 3만냥을 하사했다. 이때 행궁을 세웠다.

이자성행궁의 이천문.
이천문에 걸린 ‘무당분경’ 편액.
이자성이 바라본 자리에 원숭이 조각이 장식돼 있다.

계단 30여개를 올라 이천문을 지난다. 장부 한 명이 지키면 1만명도 거뜬하게 막는다는 형세다. 연이어 옥황각이 나온다. 아치형 문틈을 통해야 이층으로 올라간다. 무당분경(武當分景)이라 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자성이 멀리 경치를 조망하던 자리다. 무장이 경치를 분별한다는 것은 허와 실을 구분하고 미래를 판단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로 읽힌다. 편액은 건륭갑진(乾隆甲辰) 즉, 1784년에 걸었으니 민란군을 토벌한 청나라도 이자성에 대한 예우가 남달랐던 듯하다. 햇볕을 가리고 오른손을 머리에 올린 원숭이가 귀엽다. 우화라도 자세히 보면 꽤 듬직한 역사를 담는다. 이자성은 경천동지할 세상을 꿈꿨으리라.

이자성(붉은 망토)이 ‘분병정향’ 작전을 제안하는 그림이 이자성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자성은 민란 연합군 수령이자 틈왕(闖王)이던 고영상의 부하 장군이었다. 고영상 사후 틈왕을 승계했다. 1635년 초 고영상은 대규모 토벌에 대비하기 위해 72개 군영을 대표하는 13개 민란군 수령을 허난성 싱양(滎陽)으로 소집해 공동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일개 장수였던 이자성은 분병정향(分兵定向)이라는 기발한 작전계획을 제시했다. 여러 수령이 다양한 방안을 제시했지만 모두 거부되고 이자성의 작전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일약 민란을 대표하는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붉은 도포를 입은 이자성이 작전을 설파하는 장면이 행궁에 전시돼 있다.

이러한 내용은 ‘명사(明史)’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군사를 다섯으로 나누어 넷은 동서남북으로 출격하고 주력 부대는 상황에 따라 지원 부대 성격을 가지고 펼치는 연합작전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창의적인 계획이었다. 게다가 토벌군이 가장 취약한 동쪽으로 주력 부대를 진군시키자는 군사작전이었다. 위상이 격상된 이자성은 주력 부대에 포함됐다. 병력을 나누고 약한 고리를 파악해 힘을 집중하는 생각, 과감한 행동은 이자성이 지닌 리더십을 잘 드러낸다.

이자성이 금의환향하는 장면을 담은 이자성기념관의 그림.

민란군 주력 부대는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의 고향인 안후이성 펑양(鳳陽)을 점령했다. 조상이 묻힌 황릉 무덤을 도굴해 훼손하고 사당을 지키던 주씨 일가를 몰살했다. 주원장이 출가했던 황각사를 전소시켰으며 관군을 참수하고 죄수는 석방했다. 명나라 숭정제는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했으며 소복을 입고 사당에서 통곡했다. 1643년 이자성이 건국하고 황제를 칭하자 숭정제는 보복했다. 미즈에 있는 이자성의 조상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불태웠고 행궁을 훼손했다. 이자성은 조카 이과를 대장으로 3만명을 출병시켜 행궁을 더욱더 화려하게 복원했다. 이자성도 다시 한번 고향을 찾았다.

계상전 고루.

황제가 된 이자성이 의기양양하게 궁문을 들어섰으리라. 안으로 들어서니 왼쪽에 고루, 오른쪽에 종루가 배치돼 있다. 마당 양쪽에 기념비석이 차례로 서 있다. 당시 회의실로 사용하던 계상전(启祥殿)은 지금 이자성기념관이다. 출생 이후부터 봉기의 깃발을 들고 민란군을 이끈 동선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자금성 함락 이후 청나라에 쫓겨 후퇴한 노선도 있다. 책사 이암이 제안한 균전면부(均田免赋) 정책도 보여준다.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고 세금을 면제한다는 혁명적인 정책은 지주계급의 이익을 탈취해 농민에게 되돌려주자는 구호였다. 신중국이 이자성의 민란을 주목했던 이유다.

미즈의 미인을 자랑하는 ‘미즈포이’ 사적관.

조경궁(兆慶宫)은 이자성이 휴식을 하던 공간이다. 현재 미즈포이(米脂婆姨) 사적관이다. ‘포이’는 할머니와 이모인데 여인을 이르는 방언이다. 미즈가 배출한 미인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고대 중국의 4대 미인 초선이 등장한다. 소설 삼국지 초반부를 흥미롭게 주도하는 인물이다. 정사에는 초선의 고향이 미즈라는 근거가 없다. ‘미즈현지(米脂縣志)’에 기재돼 있다는 주장이다. ‘쑤이더현지(綏德縣志)’에는 여포의 고향이라는 기록도 있다. 미즈에서 남쪽으로 40km 떨어진 지방이다. 미즈와 쑤이더는 모두 은주(银州)였다. 연환계로 등장한 초선을 부인으로 두려고 양아버지를 살해한 여포는 동향이었다.

미즈포이에 전시된 초선과 고계영.

그러나 초선이나 여포가 은주가 낳은 역사 인물이라는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정사에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 인물을 유인해 기정사실로 하는 사례가 많다. 특히 소설 주인공의 고향이 여러 군데인 이유다. 뮬란의 고향을 자처하는 지방만 대여섯 군데나 된다. 노자의 고향을 두고도 두 도시가 싸운다. 이런 사례는 많다. 틈왕의 부인 고계영은 다르다. 이자성의 부인으로 낭자군을 조직해 전투에 참여했다. 이자성의 민란이 실패한 후에도 반청 전투에 나선 인물이다.

두차이전과 저우위칭

20세기 이후 배출한 여성 공산주의자는 실존 인물이다. 마오쩌둥이 ‘야명주(夜明珠ㆍ야광 구슬)’라 칭찬한 가오민전, 서북 혁명근거지를 창건한 류즈단(산시 일대 혁명 1세대로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과 동지)의 통신원인 저우셩룽도 자랑하고 있다. 1930년대 출생한 두차이전과 저우위칭은 인민해방군 소속으로 한국전쟁(중국에선 ‘항미원조전쟁’이라 칭한다)에 참여했다.

당시 공산당 지도자의 부인이 된 경우도 있다. 개국공신이자 중국인민정부 부주석을 역임한 가오강의 부인 양즈팡, 공산당 내 최고 군사전략가인 린뱌오의 부인 장메이도 미즈 출신이다. 둘 다 일찍 헤어졌다. 만주 해방에 공을 세워 ‘동북왕’으로 유명한 가오강은 1954년 자살했고, 마오쩌둥 후계자라는 위상을 거머쥔 린뱌오는 197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둘 다 당과 국가 전복 혐의를 받았다.

악루에서 본 팔괘정.
악루. /이자성행궁 전경.

행궁 왼쪽에 악루와 팔괘정이 있다. 이자성은 악루에 사람들을 초청해 3일 동안 연회를 베풀었다. 춤추고 노래하며 여민동락했다. 고향 사람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백성이 주인되는 왕조를 개창하지 못했다.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돌아오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진원지로 지목된 후베이 성도 우한에서도 남쪽으로 180km 떨어진 마을에 무덤이 있다. 고향에서는 1,400km 떨어진 곳이다. 이자성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땅은 틈왕진(闖王鎭)이 됐다. 틈왕 무덤을 찾아가고 싶어진다.

미즈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차창에 비친 주민들 모습.
자금성으로 들어서는 이자성 그림.

기차를 기다린다. 미즈 여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역으로 들어서는 차창으로 백성들 얼굴이 스치듯 비친다. 물론 명나라 말기의 백성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이다. 300년 전 자금성에서 황제 대관식을 펼친 이자성과 천안문에서 신중국을 선포한 마오쩌둥은 서로 다르지 않다. 마오쩌둥이 이자성이다. 민란 영웅 이자성이 곧 대장정을 펼친 마오쩌둥이다. 이자성의 고향을 떠나며 애써 나란히 대입해본다. 기차가 떠나고 여러 번 정차와 출발을 반복하건만 여전히, 상념을 비우지 못하고 있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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