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칼럼] 낭만 없는 사회에 대하여

입력
2020.01.23 18:00
최근 벌어진 이른바 ‘이국종 사태’는 유희석 전 아주대 의료원장이 한 욕설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실상은 우리네 중증외상센터가 가진 근본적인 현실이 그 본질이다. 이 현실은 생명보다 돈이 우선시 되는 ‘낭만 없는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을 보여 준다. 사진은 2017년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에서 이국종 교수가 귀순 병사의 상태를 설명하는 모습. 연합뉴스

언어는 계속 변화한다. ‘낭만’이라는 단어도 프랑스어 ‘로망(roman)’의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가져온 말로 본래는 ‘대중적인 말로 써진 설화’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우리말샘)’라는 뜻으로 바뀌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에서 낭만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낭만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의미가 더해지고 있다. 그것은 자본화된 사회에서 지나치게 계산적으로, 현실적으로 이뤄지는 선택과 달리 이상적인 선택을 하는 어떤 행위의 의미다.

최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국종 교수는 낭만이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주인공이다. 드라마 ‘골든타임’은 물론이고 최근 시즌2로 방영되고 있는 ‘낭만 닥터 김사부’의 실제 모델이라는 점 때문에 그는 종종 ‘낭만닥터 이국종’으로 불렸다. 이국종 교수는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과 귀순 북한 병사 오청성씨를 살려낸 국내 중증외상분야 최고 권위자로 주목됐던 인물. 또한 그는 현재 의료계만이 아닌 국정 운영에서도 어떤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골든타임’이란 용어를 보편화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강연에서 골든타임의 중요성을 알리며 세월호 참사 당시 헬기를 타고 내려다 본 인근 해역에 메인 구조 헬기들이 모두 앉아 있었던 안타까운 상황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만 비행하고 있잖아요. 전 말 안 들으니까.” 골든타임을 속절없이 보내버린 컨트롤 타워 부재에 대한 참담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2012년 11월 ‘MBC스페셜’에서 방영된 ‘골든타임은 있다’라는 다큐멘터리는 중증외상센터가 얼마나 힘겨운 곳인가를 실감하게 한 바 있다. 잠을 쪼개 촌각을 다투는 수술을 끝없이 해야 하고 흔들리는 헬기를 타고 환자를 이송하며 응급조치를 해야 한다. 심지어 헬기가 내리지 못하는 곳에서는 의사가 몸에 줄을 매고 타고 내려가 환자를 봐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워낙 힘든 기피 분야라 인력 부족으로 의사들도 힘들지만, 감당할 수 없는 수술비로 환자 가족들 또한 힘겨운 곳이었다. 하지만 그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었다. 병명이 A4 두 장에 달할 정도로 복합적인 중증 외상을 입어 ‘A4용지 두 장’이라 불렸던 한 환자. 하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미러클’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그 기적은 그냥 일어난 게 아니라 이국종 교수팀의 남다른 환자에 대한 다소 ‘낭만적인’ 열정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당시 외과 레지던트 1년 차였던 심주현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다른 분들이 고개 젓고 이 사람은 안 되겠다고 할 때 이국종 선생님은 무슨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부분을 굉장히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요.”

최근 벌어진 이른바 ‘이국종 사태’는 유희석 전 아주대 의료원장이 한 욕설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실상은 우리네 중증외상센터가 가진 근본적인 현실이 그 본질이다. 아주대병원 측에 따르면 중증외상센터가 국고의 지원을 받고는 있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만성 적자를 내고 있다고 했다. 병원입장에서 중증외상환자는 저수가라 환자를 받으면 받을수록 적자가 난다는 것. 그러니 이국종 교수처럼 더 열심히 일하며 병상이 부족하다고 아주대병원 본원에 병실을 추가로 내달라고 하는 인물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헬기를 띄우는 일도 비용이 드는 일이면서 최근에는 헬기 소리에 대한 인근 지역 주민들의 민원이 폭증해 병원 측에 큰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즉 이 문제는 아주대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증외상센터 같은 꼭 국민에게 필요한 곳이 적자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의료계 시스템의 문제이고, 나아가 ‘집값 떨어질까’ 걱정하는 지역 이기주의 또한 겹쳐져 있다.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건 역시 ‘돈’이다. 돈이 안 되거나 돈을 더 쓰게 되거나 혹은 돈을 못 벌지도 몰라 배척되는 현실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 현실을 들여다보면 생명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낭만 없는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을 보게 된다. 생명을 다루고 있는 의료계는 너무나 많은 것이 돈과 이익을 중심으로 가치 판단되는 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다. 일반외과를 지원하는 의사들이 점점 줄어들고 외과라고 해도 성형외과 같은 ‘돈 되면서 리스크는 적은’ 과를 택해 개원하려는 의사들이 많아지는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낭만 없는’ 현실이 어디 의료계뿐일까. 법조계는 물론이고 공직이나 심지어 교육계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풍경들을 보곤 한다. 정의를 지키는 일이나 국민에 헌신하는 일 혹은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위한 진정한 교육 같은 말들을 ‘낭만적’이라며 비현실로 치부하는 사회가 아니던가. 낭만 닥터는 물론이고 낭만 검사, 낭만 공직자, 낭만 교사들이 더 많아지는 사회는 어째서 꿈꿀 수 없는 걸까.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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