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수준 투쟁으로 전환하자!

입력
2020.01.20 18:00
수정
2020.01.20 19:00
29면
11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사퇴와 검찰개혁 등을 촉구하는 ‘2020 광화문탈환 촛불문화제’(왼쪽)와 보수단체 회원들의 맞불집회가 경찰 펜스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열리고 있다. 뉴시스
11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윤석열 검찰총장 사퇴와 검찰개혁 등을 촉구하는 ‘2020 광화문탈환 촛불문화제’(왼쪽)와 보수단체 회원들의 맞불집회가 경찰 펜스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열리고 있다. 뉴시스

거대 도시 서울에 광장다운 광장은 없다. 유럽의 도시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광장의 역사를 가져보지 못해서일까. 새로운 도시를 만들 때도 그럴싸한 광장 하나 미리 마련하지 못하고 빈 땅만 있으면 건물 올리는 데에 혈안이다. 부동산 가격은 엄청난 도시지만 광장의 가격은 빈약한 저렴한 도시다. 광장은 다양성을 수렴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광장은 양가적이다.

창의성이 뛰어난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없던 광장을 만들어냈다. 일시적으로, 때론 동의와 합의하에 도로의 통행을 막고 거대한 광장을 만들었다. 국정 농단에 대한 비판과 저항, 탄핵에 대한 외침 등을 이끈 광화문광장이 그랬다. 지금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공간을 임시 광장으로 삼아 각자의 주장과 소신을 피력한다. 한쪽은 깃발(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기까지)이고 다른 한쪽은 촛불이다. 누구나 생각과 판단이 다르다. 가치관과 철학도 다르다. 나만 옳고 너는 무조건 그르다는 건 폭력과 야만이고 정치적 사회적 자살 행위와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임시 광장에서 으르렁댄다.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집회ㆍ시위ㆍ결사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절대적 권리이며 가치다.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어느 한쪽의 광장에만 기울어지면 위험하다. 솔직히 백 날 천 날 떠들어봐야 서로에게 한 걸음도 다가서지 않는다. 양보와 타협은 사라지고 갈등과 분노만 충천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보자. 두 광장이 진영과 이념투쟁에만 몰두할 게 아니라 ‘수준 투쟁’에 집중해 보자. ‘수준 투쟁’이라는 말은 ‘한국이 낯설어질 때 서점에 갑니다’를 쓴 탈북작가 김주성에게 책을 써 보라고 권했던 출판평론가 김성신이 쓴 말이다.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더 나은 나라인 까닭은 잘 살아서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며 살기 때문이라고 했던 말에서 나온다. 북한이라면 인민이 권력을 절대 못 이기지만 여기는 국민이 이긴다며 그게 민주주의의 힘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생활은 그럭저럭 따라 했지만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힘들어한 그에게 김성신이 말한 건, 좌우 투쟁이 아니라 ‘수준 투쟁’이다.

그렇다. 수준 투쟁이 바로 정곡을 찌른 말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의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봉합될 수 없는 싸움이고 갈수록 간극은 벌어질 것이다. 상대를 굴복시키고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투쟁은 결국 권력 투쟁이다. 지금 우리에게 두 개의 광장이 권력 투쟁과 이념 갈등으로 심화되면 그 종국은 공멸이기 쉽다. 그렇다면 이제 끝내 설득하고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을 집회자의 숫자로 대결하는 촌스러움을 벗고 어느 광장의 수준이 더 높은지를 ‘경쟁’하면 된다. 판단은 시민이 내린다. 내 신념을 강요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폭력도 불사하는 집단의 수준과 다른 의견을 듣고(최소한 듣는 척이라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사실에 근거해 설명할 수 있는 집단의 수준은 확연히 다르다.

지금의 추세로 본다면 당분간 두 광장은 계속해 사사건건 물고 뜯으며 상대를 제압하려 할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말할 권리가 있다. 함께 모여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모여 외치면 물대포를 쏘아대고 컨테이너 성벽을 쌓는 ‘창의적인’ 대책으로 억누르던 풍경은 사라졌다. 평화적으로 모이고 논리와 사실을 찾아내며 진화하는 광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수준 투쟁의 차이가 드러난다. 수준 투쟁에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가 천박하고 퇴행적일수록 오히려 더 진지하고 인격적인 대응의 방식이 더 많은 시민의 공감을 얻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삼겹살 고깃집에서 ‘우파는 좋고 좌파는 나쁘다’는 하나원의 교육을 받은 다른 탈북자와 김주성의 대화는 매우 시사적이다. 보수는 뭐고 진보는 뭐냐는 다른 탈북자의 물음에 김주성의 답은 이랬다. “북한을 부수자와 고치자의 차이일 거예요. 아니면 싸우자와 친하자인지도 모르고요. 삼겹살이나 빨리 드세요.” 어떤 주장이건 보편타당한 논리와 사실은 기본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어느 쪽이 더 민주적이고 인격적이며 합리적인지를 따져야 한다. 그게 수준 투쟁으로의 전환이다. 각자의 주장은 서로 지겹다. 시민들도 지겨워한다.

자신들이 집권할 때는 심지어 인간의 존엄성과 헌법적 권리를 요구한 사람들의 모임에도 물대포 쏘고 컨테이너 산성 쌓던 사람들도 지금은 아무런 제약이나 체포 구금의 공포 없이 마음껏 떠들고 있다. 그건 이미 수준 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적어도 수준 투쟁에서 이기려면 그 과오에 대해 먼저 사과부터 할 일이다. 그래야 수준을 회복한다. 우리 서로 격 떨어지게 살지 말아야 한다. 쪽 팔리면서 수준 투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의 광장들이 더 높은 수준 투쟁으로 진화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사회적 국가적 진화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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