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에 바친 청춘… 지나고 보니 눈물마저 아름답네

입력
2020.01.17 16:15
수정
2020.01.17 19:45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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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ㆍ삼척ㆍ영월 등 주민 33명 삶 에세이 ‘광산에서 핀 꽃2’로 엮어

강원 탄광촌 주민 33명의 애환을 담은 에세이집 ‘광산에서 핀 꽃2’가 최근 발간됐다. 에세이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하 갱도로 향해야 했던 사연 등 주민들의 진솔한 얘기가 담겨 있다. 한국여성수련원 제공
강원 탄광촌 주민 33명의 애환을 담은 에세이집 ‘광산에서 핀 꽃2’가 최근 발간됐다. 에세이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하 갱도로 향해야 했던 사연 등 주민들의 진솔한 얘기가 담겨 있다. 한국여성수련원 제공

“돌이켜보면 스무 살 청춘이 감당하기엔 혹독했죠.”

지긋지긋한 가난에 치여 보리쌀 한 되라도 먹기 위해 1958년 강원도 정선 함백광업소에서 광원생활을 시작한 박찬호(82) 할아버지.

그에게 첫 직장인 탄광에 대해 묻자 긴 한숨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어둠 속에 수㎞ 지하로 내려가 이뤄지는 갱내 채탄작업은 스물을 갓 넘긴 청년에게 가혹한 중노동이었다.

“당시 내 몸무게가 50㎏ 안팎이었는데, 몸이 약하니 장비를 감당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러니 매일 힘들고 여기저기 아프지. 차라리 쓰러지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사고로 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더해져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갔다.

그러나 박 할아버지는 고된 탄광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아내와 자녀(2남5녀)들을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처절한 사투가 이어져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선 버티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20년간의 탄광생활이 모두 헛되지는 않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정선과 영월 등지 광산에서 익힌 안전관리 기술을 인정받아 건설업체로 이직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박 할아버지는 일흔 살까지 전국의 건설현장을 누빈 것은 물론, 1990년대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탄광촌을 덮친 칼바람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10년 더 일했으니 힘든 탄광생활이 삶의 밑천이 된 셈”이라며 “고단했던 삶도 나이가 들고 보니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됐다”고 자평했다.

박 할아버지를 비롯해 태백과 삼척, 정선, 영월 등 강원 탄광촌에 청춘을 바친 주민 33명의 애환을 담은 책이 최근 출간됐다.

이들은 강원도 산하기관인 재단법인 한국여성수련원과 함께 펴낸 ‘광산에서 핀 꽃2’ 에세이에서 고되지만 작은 행복을 느꼈던 솔직한 감정을 전했다.

강원 탄광지역 주민 33명의 애환을 담은 ‘광산에서 핀 꽃2’ 에세이집. 한국여성수련원 제공
강원 탄광지역 주민 33명의 애환을 담은 ‘광산에서 핀 꽃2’ 에세이집. 한국여성수련원 제공

41년 전인 1979년 12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삼척 도계읍에 정착한 안순녀(65)씨는 허드렛일을 하다 억대 연봉을 받게 된 이야기를 에세이에 담았다.

안씨는 “갱도가 무너질까 무서워 도시락도 먹지 못하는 남편과 함께 두 아들을 억척스럽게 키웠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남의 집 허드렛일은 물론 빈병과 폐지를 주워 팔고 경북 영주까지 찾아가 과일행상을 했다”는 게 그의 얘기다.

안씨가 ‘나는 축복받지 못한 사람인가 보다’라는 자괴감으로 괴로웠던 때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36년 전 주위의 소개로 시작한 보험영업에서 수완을 발휘한 것이다. 하나둘 가입자를 모으더니 억대 연봉을 받는 등 승승장구해 집도 장만하고 해외여행도 가게 됐다. 안씨는 “인생의 종착역이 되길 기대하며 정착한 탄광촌이 제겐 기회의 땅이 됐다”며 “생각해 보면 그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미소를 지었다.

이 밖에 탄광촌 주민들이 펴낸 에세이에는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갱도로 가야 했던 그 시절 아버지들의 사연, 고도성장기인 1970~80년대 산업현장의 연료인 석탄을 캐낸다는 자부심, 갱내에서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애 등 탄광촌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새까만 석탄 가루가 싫어 무작정 떠났지만 마을활동가로 고향으로 돌아온 탄광촌 2세들의 귀환 스토리도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한국여성수련원은 에세이집 출간을 위해 지난해 탄광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글쓰기교실 등을 3개월간 운영했다. 주민의 생애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함께 제작해 의미를 더했다. 유현옥 원장은 “사연마다 광산지역의 역사가 담겨 있고, 고비를 넘긴 뒤 담담히 뒤돌아보며 행복을 키워 나가는 지역민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정도”라며 “이들의 삶을 통해 희미해지던 과거 탄광촌의 역사와 의미가 다시 조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태백=박은성 기자 esp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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