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퇴직금 떼 일 뻔한 이주노동자, ‘위안부’ 영화 만든 사연

입력
2020.01.15 15:30
수정
2020.01.15 19:11
28면
구독

섹 알마문씨, 모국 ‘전쟁 성노예’ 아픔 떠올리며 제작

1998년 가구공장서 일하다 겪은 인종차별… 인권 침해 고발하는 기수로

방글라데시 출신 귀화 영화감독 섹 알마문씨는 가구 공장에서 10여 년 동안 일했다. 그는 “전화하면 ‘공장장님’이라고 존댓말 하던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보면 다 반말을 하더라”고 말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방글라데시 출신 귀화 영화감독 섹 알마문씨는 가구 공장에서 10여 년 동안 일했다. 그는 “전화하면 ‘공장장님’이라고 존댓말 하던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보면 다 반말을 하더라”고 말했다. 왕태석 선임기자

경기 남양주시 마석의 가구 공장에서 일하다 오른쪽 눈에 순간접착제가 들어갔다. 깜짝 놀라 병원을 가봐야겠다고 했더니 사장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물로 씻으면 돼.”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였다.

섹 알마문씨는 대학을 중퇴한 뒤 1998년 한국에 왔다. 먼 나라에 품고 온 ‘코리안 드림’은 산산이 부서졌다. 반말은 기본, “니네 나라 가라” 같은 혐오의 발언이 곳곳에서 쉴 틈 없이 그를 공격했다. 인종차별이었다.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받은 월급은 75만원. 알마문씨는 3년을 꼬박 일한 공장에서 퇴직금도 제때 받지 못했다. 사장이 알마문씨가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줄 알고 돈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벼랑 끝에 몰린 알마문씨에 손을 내민 쪽은 그의 한국인 친구가 소개해준 한 노동조합이었다. 그는 노조의 도움으로 230여만원의 퇴직금을 받았다.

이 인연을 계기로 그는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지난 9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아시아미디어컬처팩토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청와대 앞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시위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다고 늘 거리에 나가 머리띠를 둘러매고 시위만 하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이방이었던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소수자의 아픔을 세상에 알렸다. 이주노조 수석 부위원장인 그는 아시아미디어컬처팩토리에서 감독으로 활동한다. 알마문씨는 정소희씨와 다큐멘터리 영화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2018)를 만들어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이주 여성 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쓰는, 인권 침해를 비판한 영화였다.

그런 알마문씨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전쟁 성노예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비란고나(Birangona)’를 만들었다. 비란고나는 1971년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을 일컫는다.

알마문씨는 “방글라데시에선 일본에 대해 좋게만 배웠는데 한국에 와 위안부 문제를 알게 돼 충격을 받았다”라며 “방글라데시에서도 문제였던 전쟁 성노예 문제를 한국에서도 접해 그 실상을 좀 더 알리고 싶었다”고 제작 계기를 들려줬다. 알마문씨는 지난달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단체 ‘나눔의 집’에 가 피해 할머니를 직접 만났다.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직접 듣고 그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알마문씨는 “비란고나 중에선 전쟁 후 집에서 받아주지 않아 나가 산 사람이 있었다”며 “전쟁 성노예 가해자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제대로 된 반성이 없으면 잘못은 반복된다는 걸 확인해 꼭 영화로 심각성을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편집 과정 등을 거쳐 올 연말에 영화를 공개할 계획이다. 알마문씨에게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은 “목소리 없는 사람이 목소리를 갖게 된 일”과 같다.

알마문씨는 2009년 귀화했다. 20년 넘게 한국에서 산 그는 이제야 한국사회가 다양성에 대한 고민이 움트기 시작했다고 봤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말이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를 꼽았다.

알바문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엔 그가 지난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세컨드 홈’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국이 두 번째 고향이 된 그는 “계속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