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뉴구세요?] ‘루팡이 된 코스트 킬러’ 카를로스 곤

입력
2020.01.10 09:00
수정
2020.01.10 11:21
지난해 4월 보석으로 풀려나는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 AP=연합뉴스
지난해 4월 보석으로 풀려나는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 AP=연합뉴스

“세계적인 기업 회장이었던 사람이 상자에 숨어서 탈출 했다고요?! 왜?”

카를로스 곤 전 르노ㆍ닛산 얼라이언스 회장을 두고 세간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영화를 방불케 하는 ‘탈출극’ 때문인데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닛산의 영웅’으로 불리던 그가 이 같은 도주를 감행하게 된 걸까요.

곤 전 회장은 2018년 11월 유가증권 보고서 허위기재와 특별배임 등 혐의로 일본 사법당국에 구속됐다가 지난해 3월 보석으로 풀려났어요. 하지만 한 달여 만에 재구속, 그리고 다시 추가 보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희대의 탈출극이 벌어진 겁니다.

카를로스 곤=루팡?

“곤 전 회장을 두고 루팡 3세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TBS 아즈미 신이치로 아나운서의 말인데요. 곤 전 회장은 어떻게 루팡과 비교 대상이 된 걸까요.

루팡은 프랑스 추리소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작품 속 인물이라는 것, 다들 아실 텐데요. 도둑이지만 사회의 악을 주로 범죄 대상으로 삼고, 어떤 상황에서든 뛰어난 변장술 등으로 현장을 빠져나가 절대 잡히지 않는 게 특징이죠. 이번 사건에 루팡이 언급된 건 그만큼 곤 전 회장의 탈출기가 기상천외했기 때문일 겁니다.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의 변호인인 히로나카 준이치로 변호사가 지난달 31일 곤 전 회장의 도주와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의 변호인인 히로나카 준이치로 변호사가 지난달 31일 곤 전 회장의 도주와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산케이 신문 등에 따르면 출국금지 상태였던 곤 전 회장은 지난달 29일 오후 모자와 마스크를 쓴 상태로 자택을 나와 일본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탄 뒤 터키 이스탄불로 향했습니다. 이후 그는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30일 레바논 베이루트에 도착했습니다. NHK는 곤 전 회장이 대형 음향장비 상자에 숨어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죠.

왜 레바논인가

곤 전 회장은 8일 오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는 모든 혐의에서 무죄”라며 “정의를 원하기 때문에 일본을 탈출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법정에 설 준비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왜 하필 레바논으로 탈출했고, 왜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연 걸까요?

곤 전 회장은 브라질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학창시절을 보낸 곳은 레바논입니다. 레바논, 프랑스, 브라질 등 다국적을 가진 곤 전 회장이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레바논은 그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했을 텐데요. 레바논 시민들도 곤 전 회장을 각별하게 여겨왔습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2017년 부패인식지수(CPI)에서 180개국 중 143위를 차지할 정도로 부패에 시달리는 레바논에서 대선 때마다 곤 전 회장은 후보로 거론됐습니다. 2017년에는 그의 얼굴을 담은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을 정도에요.

무엇보다 레바논은 일본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았는데요. 일본이 곤 전 회장의 신병 인도를 요구해도 레바논 정부가 응하지 않으면 곤 전 회장을 체포하기 어렵다는 말이죠.

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저택 앞에 취재진들이 몰려있다. 베이루트= EPA 연합뉴스
4일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저택 앞에 취재진들이 몰려있다. 베이루트= EPA 연합뉴스

조력자들

이런 희대의 탈출극을 곤 전 회장 혼자서 해낼 수는 없었을 텐데요. 아사히 신문,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다수 외신은 그를 도운 조력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미국인 2명이 곤 전 회장의 도주를 직접 도운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이들은 지난달 말 일본에 입국해 간사이 공항 인근 호텔 방에 대형 음향상자 2개를 넣어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인 2명과 곤 전 회장은 지난달 29일 탈출 당일 이 호텔에 모였고, 호텔에서 나올 때 곤 전 회장은 상자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매체는 전했습니다. 미국인 2명이 호텔을 나설 때 대형 상자를 실은 수레를 1개씩 끌었고, 이 중 한 상자에 곤 전 회장이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상자는 자가용 비행기에 실려 일본을 떠난 거죠.

월스트리트저널(WSJ)도 “복수 국적의 10∼15명이 곤 전 회장의 탈출을 도왔으며 이들은 사전에 일본을 20차례 이상 찾아 10곳 이상의 공항을 답사했다”고 전했습니다. 큰 화물에 대한 엑스레이 검사가 없는 간사이 공항을 표적으로 삼게 됐다는 거죠.

코스트 킬러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체포된 지 50일 만인 지난해 1월 8일 도쿄지법에서 열린 심문에서 무죄를 주장했다는 영문 기사가 당시 도쿄 거리의 한 전광판에 떠 있다. 도쿄=연합뉴스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 얼라이언스 회장이 체포된 지 50일 만인 지난해 1월 8일 도쿄지법에서 열린 심문에서 무죄를 주장했다는 영문 기사가 당시 도쿄 거리의 한 전광판에 떠 있다. 도쿄=연합뉴스

곤 전 회장은 한때 ‘코스트 킬러’(cost-killer) 혹은 ‘코스트 커터’(cost-cutter)라고 불렸어요. 그의 과감한 비용절감 기법으로 붙여진 별명입니다. 프랑스 자동차 업체 르노 출신인 곤 전 회장은 1999년 경영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닛산 자동차의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발령 받았습니다. 이후 20년 동안 닛산 경영을 총괄해 왔는데요. 취임 첫해 자산 85%를 매각 처리하고, 전체 사원의 14%에 해당하는 2만1,000명을 회사에서 내보냈죠. 일부 공장은 폐쇄를 했고요.

이런 과감한 구조조정과 공격적인 신차 개발ㆍ투입 등으로 닛산은 2001년 흑자로 돌아섰고 1조4,000억엔에 달하던 악성 부채를 모두 변제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에는 외국인 경영자로는 최초로 일본 정부가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훈장인 ‘남수포장’(藍綬褒章)을 받기도 했습니다.

영웅의 추락

‘닛산의 영웅’이던 그가 어떻게, 왜 추락을 하게 된 걸까요. 2018년 11월 무시무시하다는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됩니다. 5년간 1,000억원 가까운 보수를 받고도 절반만 축소 신고했고, 회사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을 한 혐의입니다.

놀라운 건 검찰에 정보를 제공한 이들이 다름 아닌 닛산 경영진들이라는 겁니다. 회사 내부자들이 똘똘 뭉쳐서 도쿄지검 특수부라는 칼을 빌려 회사의 영웅을 추락시킨 거죠.

그 배경을 두고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이 프랑스와 일본 정부, 그리고 르노와 닛산의 갈등인데요. 르노는 닛산의 지분을 43%, 닛산은 르노의 지분 15%를 가지고 있죠. 지분상 르노가 닛산을 지배하지만, 기술력이 앞선 닛산이 르노를 받쳐주는 어정쩡한 관계죠. 이런 와중에 프랑스측이 원하던 르노와 닛산의 합병을 곤 전 회장이 밀어붙이자 축출을 모의했다는 겁니다. 여기엔 일본 정부까지 가세를 했다는 얘기까지도 흘러나오는데요. 곤 전 회장의 변호인도 성명을 통해 “닛산 경영진이 닛산-르노 합병을 추진하는 곤 전 회장을 축출하기 위해 쿠데타를 꾸몄다”고 강조했는데요. 곤 전 회장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똑똑, 뉴구세요?’가 마음에 드셨다면 <뉴;잼>을 구독해 보세요.

박민정 기자 mjmj@hankookilbo.com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