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와 표적] 냉전 아이콘서 북한 억제까지 B-52 ‘노익장’

입력
2019.12.26 20:00
수정
2019.12.26 21: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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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기 B-2보다 유지비 적어 2045년까지 현역으로 활약 전망

“유사시 괌서 3, 4대만 출격해도 김정은 숨은 평양 초토화”

미군의 전략 폭격기 B-52. 위키피디아 캡처
미군의 전략 폭격기 B-52. 위키피디아 캡처

# 2003년 8월 19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주코프스키 비행장. 엔진 8개를 장착한 육중한 기체 한 대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기체에는 미 공군 소속임을 알리는 문양이 선명했다. 이 비행기는 냉전 기간 소련을 겨냥하던 미 공군의 전략폭격기 B-52였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의 핵 투발 수단으로 알려졌던 B-52가 러시아 땅에 착륙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 종식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군 ‘핵우산’ 핵심 자원… 베트남ㆍ걸프ㆍ아프간 누벼

67년간 세계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략폭격기가 있다. B-47의 후계기종으로 개발돼 1952년 첫 비행에 성공한 전략폭격기 ‘B-52 스트라토포트리스’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맹활약한 B-17 플라잉포트리스와 B-29 슈퍼포트리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B-52는 1955년 실전배치된 이후 미 전략공군사령부의 핵심 전력이자 미국이 동맹국에 제공하는 ‘핵우산’ 전략 중 하나로 꼽힌다.

B-52는 냉전과 그 이후 미국이 참전했던 여러 전쟁에서 그 위용을 뽐냈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트남전쟁이다. 당시 B-52는 기체당 100여발의 폭탄을 싣고 베트남 상공을 누볐다. 이른바 ‘폭탄 비’를 선보이면서 ‘호치민 루트’가 있는 정글 지역과 북베트남 항구를 초토화시켰다. 하노이시내의 한 호수에는 베트남전쟁 중 북베트남군이 격추한 B-52의 잔해가 지금도 보존돼 있다. 북베트남이 전시에 올린 성과 차원에서 남은 흔적이지만 역설적으로 B-52가 얼마나 큰 위협이었는지를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당시 북베트남군은 지대공미사일 1,000여발을 발사해 B-52 15기를 격추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1991년 걸프전에서도 B-52의 활약은 돋보였다. 미국 본토에서 출격해 2만㎞를 중간급유 없이 비행해 이라크를 강타한 것이다. 미국이 발사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등에 가려졌지만 걸프전의 공식 시작은 미 본토에서 출발한 B-52가 이라크 땅에 폭탄을 투하한 시점이기도 하다. 당시 B-52는 다국적군의 이라크 폭격 중 40%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이 벌인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도 B-52는 ‘현역’ 신분이었다. 장시간 체공능력을 바탕으로 지상군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면 탈레반 측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3대가 B-52 조종사로 활동해 화제를 모았던 돈 스프라그(왼쪽부터) 예비역 공군 대령, 데이비드 웰치 공군 대위, 돈 웰치 예비역 공군 대령 가족. 미 공군 제공
3대가 B-52 조종사로 활동해 화제를 모았던 돈 스프라그(왼쪽부터) 예비역 공군 대령, 데이비드 웰치 공군 대위, 돈 웰치 예비역 공군 대령 가족. 미 공군 제공

◇‘장수’ 덕분에 3대 탑승 진기록도

B-52의 ‘장수’는 후계기들의 의도치 않은 부진이 큰 원인으로 꼽힌다. 후계기로 낙점됐던 B-2 스피릿은 예산 문제에 발목이 잡혔다. B-2는 최저 가격이 7억3,700만달러에 달했다. 유지비도 비행시간당 13만5,000달러가 소모됐다. 2004년까지 B-2에 소모된 총 비용만 447억달러였다.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도 예산이 풍족한 미 공군이 20여대밖엔 발주하지 못한 이유다.

이로 인해 B-52에는 진기록이 남았다. 할아버지와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3대가 B-52라는 한 기종의 조종사로 복무한 것이다. 2013년 9월 영국 데일리메일은 베트남전에서 B-52를 조종했던 돈 스프라그 예비역 공군대령의 가족을 소개했다. 그의 아들은 냉전 시기에 B-52의 조종간을 잡았었고, 지금은 손자도 B-52의 조종사로 복무하고 있다. 미 공군이 B-52를 추가 개량해 최소한 2045년까지 사용하겠다고 밝힌 만큼 이런 진기록의 사례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B-52폭격기가 2013년 3월 19일 오후 평택 하늘을 비행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B-52폭격기가 2013년 3월 19일 오후 평택 하늘을 비행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북핵 위기 등 상황에서 압박 수단 되기도

B-52는 북한이 가장 껄끄럽게 생각하는 무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위기가 고조됐을 때 한미 양국은 키리졸브 등 연습훈련을 진행하면서 B-2와 B-52를 3차례 이상 출격시켜 가상 표적을 타격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이에 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전략미사일부대 작전회의를 긴급 소집해 언제든 실전 발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략폭격기 B-29의 폭격으로 평양은 쑥대밭이 된 적이 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이 “미군의 폭격으로 73개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평양에는 건물 2채만 남았다”고 했다는 발언은 지금도 회자된다. 북한에게는 한국전쟁 동안 전략폭격기에 당한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이다.

2015년에는 우리 정부가 B-52의 한반도 배치 가능성을 열어두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당시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관련 보도들이 쏟아지자 “미군 전략자산의 전개 시점을 탄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말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B-52는 2017년 사상 처음으로 일본 항공자위대 전투기 부대와 연합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부 관계자는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B-52의 동향은 북한에 주는 정치적ㆍ군사적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근래 ‘연말 시한’을 주장하면서 미국을 향해 ‘크리스마스 선물’ 엄포를 놓는 상황에서도 B-52의 한반도 전개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이 나왔다. 괌에 배치된 B-52는 유사시 정밀 유도폭탄을 싣고 한반도로 출발해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장과 주요 시설을 파괴할 수 있다. 만약 B-52 서너 대가 동시에 한반도 상공에 전개돼 집중 폭격을 가하면 평양은 완전히 초토화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예측이다.

앞서 미국은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괌 기지에 있던 B-52 폭격기 3대를 한반도 상공으로 보내 북한을 압박했다. 또 북한이 4차 핵실험을 진행한 2016년 1월에는 B-52에 핵미사일을 탑재시켜 한반도 상공을 누비게 하는 ‘무력시위’에 나섰다.

’B-52’ 제원표.
’B-52’ 제원표.

◇새 미사일 운반체계로 낙점… 현장 지키는 ‘노익장’

미국 공군은 지난 6월 B-52에 탑재할 극초음속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AGM-183A로 명명된 이 미사일의 개발완료 시기는 2022년이다. 미 공군은 공중발사 신속대응무기(ARRW)로 분류되는 이 새로운 미사일의 운반 수단으로 B-52를 낙점했다.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총 742대가 생산된 B-52 중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금도 전 세계 하늘을 누비고 있는 것은 68대 정도로 추정된다. 1962년부터 3년간 마지막 생산분인 B-52H 102대 중 꾸준히 개량돼온 기체들이다. 연료탑재 공간과 내부 무장창을 개선해 조종 편의성과 연비 효율을 개선했다. 통신장비와 항법장비도 최신형으로 바꿨다. 1991년부터 21대가 생산 배치된 B-2 스피릿이 퇴역하고 그 후계기가 등장하는 상황에서도 B-52는 여전히 꿋꿋하게 현장을 지키고 있다.

김진욱 기자 kimjinu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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