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 칼럼] 뉴트로와 사랑의 재개발

입력
2019.12.26 18:00
29면
유산슬의 ‘사랑의 재개발’ 뮤직비디오 영상 캡처
유산슬의 ‘사랑의 재개발’ 뮤직비디오 영상 캡처

“싹 다- 갈아엎어주세요-” 경쾌한 리듬에 귀에 쏙 박히는 ‘싹 다-’라는 펀치라인 가사 때문인지 트로트 신인 유산슬(유재석)의 ‘사랑의 재개발’은 처음 노래가 나올 때부터 화제가 됐다. 방송인으로서도 맹활약하는 이 곡을 쓴 김이나 작사가는 ‘사랑’과 ‘재개발’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을 가져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신세대 트로트 가사로 만들었다. ‘나비 하나 날지 않던 나의 가슴에 재개발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이 노래에서 ‘재개발’의 의미는 ‘새로운 사랑’ 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노래의 화자는 사랑의 상처를 입은 상태였을 게다. 그 아픈 상처를 싹 다 갈아엎고 ‘그대 맘을 심으면’ 화자는 ‘팥도 나고 콩도 날’ 것이라고 말한다. 재개발이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이 가사가 얼마나 도발적으로 기성관념을 갈아엎고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개발’이라는 단어는 한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흔히들 ‘개발시대’라고도 부르는 그 시대에 우리는 도로를 내고 아파트를 짓고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새벽부터 음악을 틀어놓고 부지런을 떨었다. 그렇게 하면 우리 모두가 잘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개발이라는 것이 당연히 기존에 있는 것들을 ‘밀어내야’ 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터전을 잃고 쫓겨나는 철거민들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모두가 잘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그걸 가진 자들이 잘사는 것이었다. 빼앗긴 이들은 터전을 잃고 도시를 떠돌거나 도시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나라는 부유해졌지만 모든 개인이 그 혜택을 누린 건 아니었다.

아파트는 우리에게는 ‘개발의 상징’과도 같은 주거공간이 되었다. 프랑스의 여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가 쓴 ‘아파트 공화국’을 보면 1970년대 우리의 아파트에 대한 열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이 “새것에 대한 맹목적 숭배”로 나타났으며, “1970년대 이후 새로운 도시의 창궐은 ‘신’이나 ‘뉴’라는 접두사를 무한대로 사용케 했다”고 했다. 그는 또 서구인들이 “직선적인 시간성에 뿌리를 두면서도 이미 지어진 가옥의 영속성에 더 집착한다”며 그 특성을 ‘축적의 문화’라고 말하면서, 반면 한국의 주택은 “서구가 보여주고 있는 도심의 박물관화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된다”며 이를 ‘유동의 문화’라고 했다. 한 마디로 우리는 70년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에 있던 것들을 ‘싹 다 갈아엎고’ 새것을 짓는데 몰두했으며 그 결과로 탄생한 게 ‘아파트 공화국’ 같은 도시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발시대의 ‘갈아엎는’ 풍경들은 우리네 삶과 문화에도 고스란히 그 그림자를 드리운 면이 있다. 그 많은 세대론들은 단적인 사례다. 신세대는 구세대를 갈아엎고, 그 신세대는 또 X세대에 그리고 그 X세대 역시 밀레니얼 세대로 갈아엎어진다. 그래서 우리네 사회가 양산한 다양한 세대들은 이전 세대와의 갈등을 당연시했다. 세대는 이어지기보다는 단절을 원했다. 하지만 갈아엎은 세대가 갈아엎어지면서 세대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있다는 걸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됐다.

최근 들어 뉴트로(New+Retro) 같은 새로운 트렌드가 생겨나고 있는 건 이러한 개발시대부터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갈아엎는’ 문화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새로 단장한 프랜차이즈보다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포를 찾고 있고, 대로가 아닌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로가 성장과 개발의 빠른 속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골목은 이제 그 속도에서 잠시 물러나 걷고픈 사람들의 느린 속도를 상징한다. 언제 어디서든 듣고 싶은 음악을 디지털로 접속만 하며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자, 불편해도 턴테이블 위에 직접 사온 판을 올려놓고 듣는 자기만의 경험이 더 소중한 가치가 되었다. 스마트폰 하나면 어떤 사진도 찍어 공유할 수 있는 편리한 시대가 되자, 인화할 때까지는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알 수 없는 필름 카메라에 설레게 되었다. 모두가 빠르게 등장해 소비되는 음악들을 들을 때 90년대에 등장했다 사라진 음악들이나 트로트를 새삼 다시 듣는 문화가 만들어졌다.

뉴트로는 그 소비층이 당대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는 점에서 복고와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그건 오히려 옛것을 갈아엎고 새것으로 채워 넣으려고만 하던 개발시대의 흐름에 대한 반작용에 가깝다. 그래서 뉴트로는 과거를 가져오되 현재적 시선으로 이를 재해석하거나 재창조한다. ‘온라인 탑골공원’을 통해 새롭게 소환된 옛 가수들은 바로 그 재해석을 통해 현재와 호흡하는 아티스트로 재창조된다. 물론 유산슬의 ‘사랑의 재개발’ 같은 곡에 대한 열광도 트로트에 대한 뉴트로적 재해석이 담겨 있다. 뉴트로는 그래서 과거를 그저 갈아엎기보다는 애정의 시선으로 과거의 것을 살리면서도 지금에 맞게 보완하는 ‘재개발’을 요구한다. 시간을 단절시키기보다는 그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그 위에 새로움이 더해지는 것. 그건 바로 ‘사랑의 재개발’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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