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칼럼] 초원과 엄마

입력
2019.12.10 18:00
초원이 아름다운 이유는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젖소들이 노닐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거친 노동이 있고 침입자들이 있고 온갖 암투가 펼쳐지기도 한다. 초원이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초원의 집에는 로라와 자매들 그리고 엄마가 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지은 집에는 사랑하는 우리 님이 있을 것이다. 말아톤에는 초원이의 엄마가 있다. 아름다운 초원에는 항상 엄마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은하철도 999, 말괄량이 삐삐, 초원의 집. 이들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하필 일요일에 방영해서 교회에 가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지난주에 오지 않은 이유를 묻는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차마 은하철도나 삐삐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초원의 집만큼은 당당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청소년에게는 왠지 있어 보이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 주인공 로라와 로라의 언니와 동생 그리고 불독 강아지 잭과 가축의 삶을 통해서 미국 근대사를 엿볼 수 있었다.

내게 초원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인상이 강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초원의 집(1976~1983)이 한창 방영되기 몇 년 전에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가 크게 유행하였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로 시작되는 노래는 1972년 발표되었다. 노랫말과 달리 나는 으스대는 멋쟁이 높은 빌딩이 보고 싶었고 유행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또 절대로 반딧불 초가집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푸른 초원 위에 지은 그림 같은 집은 꿈꾸게 되었다.

노래는 노래일 뿐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나는 한국에서 초원 따위는 구경도 못 했다. 오히려 서울로 유학 온 다음에는 멋쟁이 높은 빌딩에 둘러싸여 살았다. 그럭저럭 유행을 따르기도 했다. 독일로 유학 가서야 초원을 봤다. 물론 독일에서도 초원을 밟을 일은 없었다. 그저 자동차로 지나치면서 소가 노닐고 있는 초원을 보며 안구를 정화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독일 농부들의 삶이 그다지 부럽지는 않았다. 또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초원이라는 생각도 못 했다. 다만 목초지라고 불렀을 뿐이다. 초원은 잊힌 단어가 되었다.

초원이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다시 들려왔다. 오늘부터 정확히 27년 전인 1992년 12월 11일 아침 일곱 시, 불과 두 달 전까지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기춘과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안기부 부산지부장, 부산시교육감,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상공회의소장이 한 식당에 모였다. 지역 유력인사들이 아침 식사를 같이하는 게 뭐가 문제겠는가. 하지만 이때는 대통령 선거를 일주일 앞둔 때였다. 시기도 적절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눈 이야기는 가관이었다.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떻다 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 이런 말들이 나왔다. 지역감정을 부추겨서 당시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자는 관권선거 모의를 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식당 이름이 초원복집이었다.

사건은 묘하게 흘렀다. 언론들은 관권선거의 부도덕성을 비판하기보다 그들 대화를 도청한 정주영 후보 측 사람들의 비열함에 초점을 맞췄다. 초원복집의 대화는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초원복집 사태가 보도되자 실제로 지역감정이 자극되어 지지층을 결집하는 결과를 낳았고 여당 후보는 당선되었다. 초원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아름다움과 환상이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초원복집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번창하기를 바란다.)

왠지 퀘퀘한 구린내가 나는 단어가 된 초원에 볕 들 날이 왔다. 2005년 개봉한 영화 ‘말아톤’을 통해서다. 영화의 주인공은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초원이다. 초원이는 스무 살이 되었지만 지능은 다섯 살 수준이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귀를 뀌고, 동생에겐 마치 선생님 대하듯 깍듯이 존댓말을 쓴다. 음악만 나오면 아무 데서나 막춤을 춘다. 초원이가 등장하면 어디든 난장판이 되기 일쑤다. 다들 초원이를 힘들어한다.

엄마는 다르다. 초원이 엄마는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해온 초원의 달리기 실력에 주목한다. 전직 마라토너를 코치로 초빙하고 서브쓰리(마라톤 풀코스를 3시간 이내에 달리기)라는 목표를 설정한다. 코치는 불성실하다. “몇 바퀴 돌아요?”라는 초원의 질문에 “백 바퀴!”라고 대답할 정도다. 그러면 초원이는 정말 백 바퀴를 돈다. 혹시 자기 욕심에 초원이를 혹사시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든 엄마는 초원에게 마라톤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이때 초원이는 엄마가 평소에 하던 질문을 대신한다. “초원이 다리는?” 엄마가 대답한다. “백만불짜리 다리.” 그리고 마라톤이 시작된다. 감동 스토리다. 달리는 초원이의 모습에서 진정한 초원을 보았다. 초원은 아름답다.

초원이 아름다운 이유는 푸른 풀밭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젖소들이 노닐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목초지를 말을 타고 달리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거친 노동이 있고 침입자들이 있고 온갖 암투가 펼쳐지기도 한다. 초원이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초원의 집에는 로라와 자매들 그리고 엄마가 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지은 집에는 사랑하는 우리 님이 있을 것이다. 말아톤에는 초원이의 엄마가 있다. 아름다운 초원에는 항상 엄마가 있다.

초원복집 사건 날, 이 땅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김미숙 여사를 떠올린다. 우리 삶의 터전을 초원으로 만들어보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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