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홀로서기’ 시험대 오르는 한국 외교

입력
2019.12.09 04:40
지난달 23일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일본 나고야관광호텔에서 열린 한일외교장관 회담에서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과 악수하고 있다. 이날 회담에서 강 장관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협정 종료 '조건부 연기'와 관련한 한국 정부 입장을 설명하고 수출규제 해소 방안 등을 논의했다.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외교가 처한 상황이 엄중하다. 무엇보다 미ㆍ중 패권 경쟁이 우리 외교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좁혀 온다.

지난 8월부터 석 달간 이어진 지소미아 논란은 미ㆍ중 경쟁에 얽힌 한일 관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일본이 ‘신뢰 부족’을 구실로 반도체 핵심부품 수출을 규제한 데 대해 한국이 지소미아 폐기를 꺼낸 것은, ‘신뢰’라는 연결고리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했다.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는 전혀 별개”라던 일본이 입장을 바꾸어 양자 협의에 나서게 한 만큼,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중국 견제 논리에 부딪혀 지소미아 폐기 방침을 바꿀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인도ㆍ태평양 전략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지소미아가 2012년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혀 뜻밖의 결말도 아니다.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외교에서는 일상적인 교류 협력에 덮여 보이지 않던 국제 정치의 무정부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결과를 감내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지소미아 종료 직전에 미국이 보여준 전방위 압박이 바로 그런 순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협정의 당사자는 한국과 일본이지만, 처리 방향은 미국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다.

미ㆍ중 패권 경쟁의 와중에서 미국이 변하고 있다. 지금의 미국은 지난 70년 동안 안보와 시장을 공공재로 제공해온 패권 국가의 여유 있는 모습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방위비분담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졌고, 주한미군 철수도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여름 트럼프 대통령이 “휴대폰으로 세계를 재패하고 최고의 의료보험을 갖춘 부자 나라 한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부터다. 지난주 런던에서도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야 주한미군을 현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부분 철수를 기정사실화하는 말처럼 들린다.

더구나 지금 우리는 두 개의 미국을 상대해야 한다. 재선을 겨냥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패권 전략에 집중하는 관료ㆍ전문가집단의 이익과 우선 순위가 다르다. 트럼프의 ‘미국 제일주의’ 메시지는 유권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국무ㆍ국방 관료들과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방위비 요구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편을 들지는 않는다.

우리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어느 전문가는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를 말할 때, 일본과의 부담스러운 군사 협력을 없애려는 생각이 있었다”고 했지만, “한미동맹을 바꾸어 보자”는 말은 적어도 책임 있는 자리에서는 누구도 하지 않는다.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1950년 이후 70년 동안 우리는 한미동맹 없는 안보를 경험한 적이 없다.

우리가 처한 전략 환경이 바닥에서 바뀌고 있다. 지금껏 가보지 않은 길이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미지의 세계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우리가 두려움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도록 밀어낸다. 미ㆍ중 패권 경쟁과 미국의 변화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요구를 계속하는 북한과,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우리 입장 사이에서도 긴장과 평화의 길이 엇갈린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건, 누가 책임을 맡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난제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서두른다고 빨리 풀리지도 않고, 모른 체 한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30년 전에 유효했던 전제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한국 외교는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홀로서기’의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원해서가 아니다. 등을 떠밀리고 있다.

준비되어 있는가. 우리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그마저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다. 이삭을 줍듯이 지혜를 모아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근거 없는 희망도 성급한 비관도 걷어내고, 사안을 객관적으로 보고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기본이다.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ㆍ연세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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