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통찰력 강의]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입력
2019.10.28 18:00
정치에서 최선이나 최악은 없다. 성인군자가 정치하지 않고 유권자는 조변석개에 바람에 휘는 대나무 같으니 최선은 없다. 그래도 예전보다 식견이 늘고 판단의 능력도 합리적으로 발전해서 최악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는 차악보다 그래도 차선을 선택하는 고도의 선택 행위다. 사진은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2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경상남도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시궁창에 뒤섞이면 다 더러워진다. 같은 더러움이라도 검은 옷보다 흰 옷 입은 쪽이 훨씬 더 도드라진다. 확실히 흰 옷이 불리하다. 웃기는 건 검은 옷 입은 쪽이 흰 옷에 묻은 더러움을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게 더 더러워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과 ‘그런 것’은 다르다. 그걸 구분하지 못하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나오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괜한 말이 아니다.

논란과 시비가 끊이지 않던 장관이 끝내 물러났다. 물러날 허물이면 그게 맞고 옳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사가 그렇다. 아무리 좋은 명분과 목적을 가졌어도 도덕적 결함으로 그 직을 수행할 수 없거나 시비의 대상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를 끌어내린 쪽의 허물이 결코 만만치 않다. 쿠데타도 모자라 시민을 학살하며 권력을 찬탈한 자들 편에 붙어 호의호식 호가호위하던 자들이 당의 간판만 바꿔서 계속 권력을 누려왔다. 마음껏 불법과 불의를 저질러도 ‘같은 편’ 혹은 ‘수하의’ 검찰이 알아서 기니 몸 사릴 일도 없었다. 그렇게 저지른 패악들이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은 부지기수였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당사자가 “너희는 나보다 훨씬 더 나쁘지 않느냐?”고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어차피 한 번은 터졌어야 할 일이었다면 이참에 제대로 털고 가야 한다.

이른바 386(요즘은 586으로 불리는)세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정치적 무능이다. 치열함과 의기는 사위고 퇴색했는데도 자신들을 스스로 투사나 용사로 착각하는 건 백 번 양보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그들의 무능함은 어떻게 항변할 것인가. 무능이 별 것 아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면 그게 무능이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어설픈 기대와 희망에 기대어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이미 용기는 퇴색했고 어설프게 맛 본 권력의 맛은 달콤할 것이다. 섣불리 나섰다가 어느 유탄에 맞을지 모르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허물이 망태기째 쏟아질지 모르니 그냥 팔짱 끼고 다음 선거에나 신경 쓰면 된다고 여기는 3류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참으로 희한한 건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보다 더 남의 눈치를 본다는 점이다. 진흙탕이나 시궁창에서 백로라고 늘 하얄 수는 없다. 이미 오물이 튀었고 때가 묻었다. 그걸 인정하는 용기가 없으니 그 오물 어설프게 묻은 놈에게 뭇매 쏟아질 때 입 다물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게 유리하다고 여긴다. 똥 묻은 개를 제압하려면 자신에게 묻은 겨를 인정해야 한다. 백로도 아닌 것이 백로인 척 해봐야 헛일이다. 진짜 백로라면 그깟 오물 묻었어도 깨끗한 물에 가서 씻으면 그만이다. 이도 저도 아닌 것들이 진흙탕 곁에서 구경만 하면서 제 잇속이나 재고 따지고 있으니 걸린 놈만 억울한 판이다. 어쩌면 그 걸린 놈보다 제가 더 구리니 나서지도 못할 것이다.

아직 똥은 묻지 않았다면 똥 묻은 개에게 덤벼들어 준엄하게 꾸짖고 싸워야 한다. 제 몸에 묻은 겨를 고백하면 된다. 백로인 척 하던 것들이 이런 저런 때 묻은 게 부끄럽고 시민들에게 외면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똥 묻은 것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깨끗한 셈이니 싸울 만한 일이다. 정치에서 최선이나 최악은 없다. 성인군자가 정치하지 않고 유권자는 조변석개에 바람에 휘는 대나무 같으니 최선은 없다. 그래도 예전보다 식견이 늘고 판단의 능력도 합리적으로 발전해서 최악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는 차악보다 그래도 차선을 선택하는 고도의 선택 행위다.

차악은 최악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차선은 최선이 아니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게 아니다. 적어도 누가 더 사악한지는 가려서 뽑아내야 한다. 겨 묻은 개를 비난하는 건 개 주인인 시민의 몫이지 똥 묻은 개의 것은 아니다. 이왕이면 겨조차 묻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겨 묻은 걸 부끄러워하고 그 겨를 털어낼 용기가 있으면 된다. 그래야 똥을 묻히지 않는다. 지금 두려워서 똥 묻은 개를 쫓아내지 못하면 똥 묻은 개들 세상이 된다. 그런 꼴 보려고 최악을 쫓아낸 게 아니다.

굴뚝을 청소하러 들어간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얼굴이 말끔한데 다른 한 사람은 새까맣게 묻었을 때 낯을 씻는 건 말끔한 사람이다. 상대의 얼굴을 보고 제 낯도 그리 되지 않았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굴뚝에서 제 낯과 옷 더렵혀질까 두려워 가만히 있다 나온 굴뚝청소부라면 그 또한 문제다. 그래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걸 넘어 물어뜯으며 제 영역 확보에 몰두하는 꼬락서니는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입으로만 호위무사 운운하며 꽁지 빼고 뒤로 숨는 겨 묻은 개들에게 집을 맡길 수는 없다. 겨 묻은 개들이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고 똥 묻은 개들에게도 같은 무게와 강도로 따지고 싸워야 한다. 그런 뒤에 웅덩이에 들어가 몸을 깨끗하게 씻으면 된다. 그게 제 몫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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