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쿠르드족의 비극과 미국

입력
2019.10.13 18:00
30면
구독
터키군의 시리아 북동부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작전 개시 사흘째인 11일(현지시간) 시리아 국경도시 탈 아브야드 주민들이 트럭에 가재도구 등을 싣고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연합뉴스
터키군의 시리아 북동부 쿠르드족에 대한 군사작전 개시 사흘째인 11일(현지시간) 시리아 국경도시 탈 아브야드 주민들이 트럭에 가재도구 등을 싣고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연합뉴스

“동맹(을 맺는 것)은 쉽습니다. 동맹은 우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국 기자가 “터키가 이들을 공격하도록 허용하면, 향후 미국이 동맹을 구축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지적한 것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답변이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쿠르드는 자기들 땅을 위해 싸운다, 우린 그들을 돕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썼다”라고도 했다. 대선 후보이던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쿠르드 군의 빅 팬”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당시 쿠르드 군은 미국이 골칫거리인 이슬람국가(IS) 격퇴에 큰 역할을 맡고 있었다.

□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국경이 맞닿은 산악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쿠르드족(族)은 인구 4,000만명의 거대 민족이다. 1차대전 이전까지 오스만튀르크 제국 치하였던 이들 거주지는 패전국 오스만튀르크를 유럽 강대국의 입맛에 따라 분할하는 과정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에 저항하는 쿠르드족에게 남은 희망은 당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선포한 ‘민족자결 원칙 14조항’ 뿐이었다. 20세기 초 쿠르드 지도자 마흐무드 바르잔지는 그 14조항의 쿠르드어 복사본을 팔에 두르고 다녔다.

□ 쿠르드족에 미국은 민족자결의 희망을 준 나라인 동시에 중동 국경을 허물어 영토를 허락할 수 있는 군사 강국이다. 하지만 미국은 번번이 독립을 향한 쿠르드족의 열망과 헌신을 배신한다. 그 배신의 역사에는 우드로 윌슨으로부터 시작해 존 F 케네디,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등 미국 역대 대통령의 결정이 줄줄이 연관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그 들 중 한 명일 뿐이라면 쿠르드족에게 다소 위안이 될까. 쿠르디스탄에는 “쿠르드족의 유일한 친구는 산뿐이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 쿠르드족의 근대사를 좇다 보면 감정이입을 피하기 힘들다. 몇 안 남은 분단민족의 일원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초강대국 미국의 동의 없이 분단민족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현실을 다시 확인하기 때문이다. 국제문제 전문 온라인 매체 ‘슬레이트’ 편집인 조슈아 키팅은 신작 ‘보이지 않는 국가들’에서 “미국은 정치적ㆍ경제적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싶어 하면서도 193곳의 주권국으로 분할된 세계지도만큼은 그대로 남겨두고 싶어 한다”고 분석한다. 미로를 헤매고 있는 현 정부의 ‘북ㆍ미 중재자론’은 과연 키팅의 분석을 넘어 통일로 전진할 힘을 갖추고 있을까.

정영오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