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동네북’ 된 영장전담판사

입력
2019.10.10 18:00
수정
2019.10.10 18:23
30면
조국 법무부 장관 동생 조모씨가 9일 오전 구속영장이 기각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 법무부 장관 동생 조모씨가 9일 오전 구속영장이 기각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영장실질심사는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한 지 3일 만에 열렸다. 당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사흘 동안 10만쪽에 달하는 수사기록을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실질심사에서 사상 최장인 8시간41분 동안 심문했다. 형사사건 베테랑으로 근무평점이 상위권인 판사들이 맡는 영장전담판사의 업무 강도는 꽤 높다. 매일 산더미 같은 기록과 전쟁을 벌이고, 심문이 길어질 때가 많아 점심을 거르기 일쑤다. 전에는 법원 내 엘리트 코스였으나 선호도도 많이 떨어졌다.

□ 판사가 피의자 대면 뒤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영장실질심사는 1997년 도입 이래 인권 보호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예상 못 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실질심사의 ‘최종심’화 현상이다. 당초 구속을 신중히 판단하자는 취지였는데 실질심사 결정이 1심이나 최종심인 대법원 확정 판결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됐다. 꼬리 격인 영장심사가 몸통인 본안 재판 이상의 영향력을 갖는 ‘왜그 더 도그’(wag the dog) 현상이다. 영장 발부 여부에 여론이 들끓고 판사 신상 털기가 난무한다. 영장 전담이 되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려 모든 만남을 끊고 칩거하다시피 하는 연유다.

□ 조국 법무부 장관의 동생 구속영장을 기각한 명재권 영장전담판사도 야당과 보수층으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그의 신상과 이력이 떠돌고 “법원의 미꾸라지” “종북 판사” 등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검사로 9년간 근무하다 2009년 판사로 전직한 뒤 지난해 영장전담 재판부 업무부담 경감 차원에서 영장전담 부장판사로 배정됐을 뿐인데, 이젠 ‘정치 성향’까지 의심받고 있다.

□ 영장실질심사를 둘러싼 불신은 일정 부분 법원이 자초한 결과다. 제도 정착을 위해 법원이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실질심사가 본안 재판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해졌다. 그런데도 법원은 영장 발부와 기각 사유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박 전 대통령 구속영장 발부 때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첫 구속영장 기각 때도 법원이 밝힌 사유는 200자 원고지 1장이 안 됐다. 검찰의 영장 청구 기준도 보다 명확히 공개할 필요가 있다. 검찰이 막강한 영장 청구 권한을 독점한 만큼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 영장전담판사를 동네북처럼 두드려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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