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비동의간음죄’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입력
2019.10.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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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 관련 대법원의 상고심 기각 결정에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희정 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 관련 대법원의 상고심 기각 결정에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미투운동 이후 다양한 성폭력 관련 법안들이 발의되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비동의간음죄’와 관련된 형법 개정안일 것이다. 2019년 6월까지 국회에 발의된 비동의간음죄 관련 형법 개정안은 총 10개인데, 여기에서 ‘비동의간음죄’란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성적인 행위(간음ㆍ추행)를 하는 것을 처벌하는 규정을 통칭한다. 비동의간음죄 형법 개정안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우리 형법에서 정하고 있는 성폭력 범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형법에서는 가해자가 폭행 또는 협박으로 피해자의 저항을 제압하여 성적 행위를 하는 경우를 강간ㆍ강제추행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성년자나 장애인, 업무상 보호감독을 받는 자 등과 같이 취약한 상태에 있는 피해자에 대해서는 권력 관계처럼 무형의 힘을 행사하거나 속임수를 이용하여 성적 행위를 하는 자도 처벌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형법상 성폭력 범죄로 처벌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저항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행사해야만 한다. 피해자가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는 처벌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현재 발의된 비동의간음죄 법안들은 피해자의 동의 의사가 없거나 거부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진 성적인 침해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동의간음죄 법안에 대한 국회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현재 209개 여성인권단체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결성되어, “강간죄의 구성요건은 반드시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며 국회의 빠른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비동의간음죄 도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비판은 확인할 수 없는 피해자의 내심 의사에 따라 성폭력 범죄의 처벌이 좌우될 수 있어 명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행위 당시에는 합의했으나 사후에 동의가 없었다고 고소하는 남용 사례가 늘어날 것이며, 성행위를 하기 전에 동의를 확인하는 계약서를 써야만 고소를 피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동의간음죄의 범죄성은 피해자의 의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동의 없이 그의 신체를 대상으로 성적 행위를 했다는 것에 있다. 피해자의 동의 여부 역시 피해자의 내심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표출된 의사를 통해 확인한다. 피해자가 말이나 행동으로 표시한 거부의사 표현이나 피해자가 술이나 약물에 취해있는 등 동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 등이 입증되어야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다고 인정된다. 그리고 무죄 추정 원칙에 따라 피고인이 피해자가 동의했음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검사가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므로,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처벌되지 않는다. 게다가 피고인의 고의라는 주관적인 요건 역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에, 피고인이 피해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처벌되지 않는다. 결국 비동의간음죄는 행위 당시에 표출되지 않는 피해자의 내심만으로는 적용될 수 없다.

오히려 비동의간음죄 도입으로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가해자의 행위가 아니라 동의 여부라는 피해자의 의사가 쟁점이 되어 피해자에게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비동의간음죄 법안들이 발의된 배경에는 법으로 처벌되는 성폭력의 범위와 사회적으로 성폭력으로 인식되는 범위의 불일치가 존재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성폭력 예방 교육이 의무화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교재에서는 성폭력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성폭력을 신고하는 사람들은 “하지마”라고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고 이야기만 하면 가해자가 성폭력 범죄로 처벌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몸을 굳히고 울었지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폭력이 인정되지 않고 피해자가 오히려 무고죄로 기소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 형법은 의사에 반하거나 동의 없는 성적 침해가 아니라 폭행ㆍ협박과 같이 저항을 제압할 정도의 유형력이 행사된 성적 침해만을 성폭력으로 처벌하고 있기 때문이다.

UN이나 유럽연합 등 국제기구들은 회원국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대방 동의 없이 이루어진 성적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상의 성폭력 개념을 변경하도록 협약이나 지침에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적 기준이 형성된 이유는 기존의 형법 규정들이 소위 강간 신화와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 속에서 피해자의 저항을 성폭력의 판단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비동의간음죄에 관한 법안들이 국회 법사위의 논의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역시 비동의간음죄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형법이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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