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어머니의 어머니

입력
2019.10.07 04:40
수정
2019.10.07 14:48
31면
변치 않은 방식으로 살아오시던 두 분도 세월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제 당신들은 오 분 거리의 식당을 걸어가기 벅차 하셨다. 할머니는 방석에 앉다가 힘이 빠져 넘어지셨고, 할아버지는 수저를 쥔 손을 계속 덜덜 떨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변치 않은 방식으로 살아오시던 두 분도 세월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제 당신들은 오 분 거리의 식당을 걸어가기 벅차 하셨다. 할머니는 방석에 앉다가 힘이 빠져 넘어지셨고, 할아버지는 수저를 쥔 손을 계속 덜덜 떨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얼마 전 지방에 갈 일이 있었다. 마침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고 계신 댁에서 지근거리였다. 오랜만에 외조부모와 점심 식사라도 할까 해서, 새벽같이 외갓집으로 출발했다. 할머니는 손주를 맞이하려고 도로변까지 나와 계셨다.

두 분은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누구의 도움 없이 열 평 남짓한 집에서 살고 계신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해방과 동족상잔의 전쟁, 후퇴까지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휴전 이후 당신들의 삶은 점차 나아졌지만, 생활 습관은 가장 힘들었던 시절 그대로 살고 계신다. 쓰레기를 거리의 여유 있는 종량제 봉투에 욱여넣어 버리시거나, 식당에서 남은 반찬을 싸오시고 낡은 러닝셔츠를 기워 걸레를 만들어 쓰며 생활하신다.

대신 핏줄에게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으신다. 당신들은 나를 보자마자 냉장고 안의 음식과 식탁에 올라와 있던 삶은 고구마까지 모조리 봉지에 담아 건네셨다. 거절하지 못하고 일단 무겁게 받아 차에 실었다. 다른 식구에게도 나누어 줄 것을 감안한 엄청난 양의 사과와 고구마였다. 자세히 보니 사과는 조금씩 멍이 들었고 크기가 들쭉날쭉했다. 고구마도 잘아서 그다지 늠름하지 않아 보였다. 당신들은 워낙 평생 이렇게 장을 보셨다. 성한 식재료는 불편해서 못 드시고, 시장에서 떨이하는 물건을 한 번에 엄청나게 많이 사신다. 그 편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드시다가 떨어지면, 다시 몇 달을 두고 먹을 만한 양을 사신다. 아끼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당신들은 이렇게 살아오셨다.

문득 이 습관이 내게 내려와 있구나 생각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유일한 딸이었다. 아직 젊은 할머니는 아직 어린 어머니에게 살림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는 성장한 어머니가 살림하는 집안에서 자랐다. 음식을 귀하게 여기는 집안 분위기 탓에 나는 좀처럼 음식을 못 버린다. 상한 음식을 먹고 배탈 난 환자를 나무라면서, 집에선 막상 조금 상한 음식도 기어코 먹어치우는 식이다. 항상 장 보러 간 마트에서 마감 세일이나 온전치 않아 할인하는 상품만 잔뜩 들고 오기도 한다.

변치 않은 방식으로 살아오시던 두 분도 세월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제 당신들은 오 분 거리의 식당을 걸어가기 벅차 하셨다. 할머니는 방석에 앉다가 힘이 빠져 넘어지셨고, 할아버지는 수저를 쥔 손을 계속 덜덜 떨었다. 식사 내내 귀가 어둡고 말이 힘들어 자유로운 대화가 어려웠다. 나는 병원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노인들을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은 대체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언어를 잃어버리거나 말을 풀어낼 기운이 없다.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생명의 소멸에서, 이제 당신들도 어느 정도 언어를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장롱에 영정 사진과 장례 비용이 담긴 통장을 준비할 정도로 매사가 철저하고, 검소하며 베풀기만 하셨던 그들이지만, 결국 당신들의 빛은 점차 저물고 있는 것이다.

먹먹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일을 마친 뒤 집에 들어왔다. 한 무더기쯤 되는 사과와 고구마와 함께. 나는 이 성치 않은 식품을 상하게 두거나 어딘가에 버리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줄 만한 것도 아니라서, 결국은 이것들을 혼자 모조리 다 먹어야 한다. 그래서 며칠 동안 고구마와 사과로만 끼니를 해결했다. 그들은 줄지 않을 기세로 냉장고 안에서 평온하게 누워 있다.

그러며 나는 마지막으로 줄어들지만 남아 있을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당신들의 세상은 영원할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이루어진 자손이, 물려받은 성치 않은 사과와 자잘한 고구마를 기어코 끌어안으며 살아가고 있다. 영영 이렇게 그들이 남긴 것들은 어딘가에 남아 세상을 구축할 것이다. 나는 그 생각으로, 오늘도 냉장고를 열며, 슬픔에 대하여, 또 그 어떤 사라지지 않음과 위로에 대하여.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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